대단히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왠지 기록하고 싶은 하루가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지금까지, 하루가 순순하게 흘러갔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잘 먹은 것처럼 마음에 포만감이 든다. 애쓰지 않아도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4시에 일어나 한 번 배를 채운 아기는 여섯시 반이 채 되기 전에 눈을 떴다. 여러 차례 뒤척이더니 눈을 반짝 뜨고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이내 나를 찾아내고는 방긋이 웃는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나도 같이 웃고 만다. 밤새 두둑해진 기저귀를 갈아주고는 한참 동안 아기 옆에 나란히 누워 그녀를 ‘감상’한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넘쳐흐르는 생명력에 경의를 표한다. 조그마한 발가락과 손가락, 보드라운 볼과 솜털 같은 머리카락에 입을 맞춘다. 예쁜 것을 보면 깨물어주고 싶은 것은 왜일까? 이리 저리 꼼지락거리는 움직임 하나 하나가 너무 예뻐서 아프지 않게 입술을 말아 넣고 앙 물어도 본다. 이렇게 예쁜 아기를 내가 낳았다니.
한참을 그렇게 뒹굴거리며 놀다가, 아기 소리를 듣고 일어난 엄마와 함께 삼대가 같이 아침 산책에 나섰다. 비가 온 다음날이라 바람이 차지만 공기는 상쾌했다. 한동안 유모차를 잘 탄다 싶었는데 달콤한 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한 블록쯤 걸었을 때부터 울먹이기 시작하더니 눈물까지 흘리며 안아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엄마와 번갈아 한 명은 아기를 안고, 한 명은 짐이 된 유모차를 끌며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자기가 싫다고 내리겠다고 하고서는 안아주면 눈으로 열심히 유모차를 쫓는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우리는 또 하하 웃는다.
새벽같이 일어난 덕분에 한참 걷다 왔는데도 집에 돌아오니 시계 바늘이 아직 8시에 닿지 않았다. 일찍 일어났으니 당연한 일인데 꼭 시간을 선물받은 것 같아 뿌듯하다. 바깥 공기를 쐬었더니 피곤한지 아기는 졸리다고 칭얼거리며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는다. 아직 이유식을 시작하지 않은 아기의 유일한 식량은 모유다. 이제 이유식을 먹기 시작하면 수유 횟수도 차차 줄어들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입을 오물거리며 열심히 젖을 찾아 무는 모습이 괜시리 더 애틋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누리는 이 안온한 행복이 오로지 지금에 국한된 것이라 생각하면 표표히 흐르는 시간이 야속하기만 하다. 꽁꽁 얼려서라도 시간을 가두고 싶은데 그럴 수는 없으니 지난 날도, 다가올 날도 너무 돌아보거나 앞서가지 않고 지금을 제대로 만끽하려 애쓰는 중이다. 물론 늘 생각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기를 자기 조카처럼 예뻐해주는 동생의 남자친구가 놀러와 한참 예뻐해주고 간 뒤, 오래 묵혀둔 숙제를 해치우기 위해 아기띠를 매고 오늘의 두 번째 외출에 나섰다. 목적지는 은행. 바람은 아침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서늘한데 서로 맞닿은 가슴팍에서는 땀이 배어나온다. 그래도 이런 날씨라 다행이라고 연신 되뇌이며 천천히 걷는다. 긴 거리는 아니지만 아기와는 처음으로 걷는 길이라 나는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소개하기 바쁘고, 아기도 처음 보는 풍경을 쫓느라 시선이 바쁘다. 은행에 도착해서도 제법 얌전히 주위를 구경하던 아기는 졸음이 오는지 칭얼거리기 시작한다. 다시 아기띠로 안아 살살 얼러주니 눈을 스르르 감는다. 고개를 잔뜩 꺾고 새우잠을 자는 아기가 안쓰러워 열심히 걸어 돌아왔다.
집에 오자마자 눈을 뜨고 배고픔을 호소하기에 수유를 하고 나니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이내 완전히 잠든 아기를 조심스럽게 눕히고는 나도 옆에 누워 지난 주에 받은 따끈한 마음산책의 신간, <음식의 위로>를 읽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한 시간 쯤 지나 뒤척이는 소리에 눈을 뜨니, 잘 자고 일어나 말간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나를 알아보고는 눈이 가늘게 휘어지도록 배시시 웃는다. 그 미소에 기운을 얻어 이제는 제법 묵직해진 7.5 키로그램의 무게를 거뜬히 안아든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두 번째 오후를 채워준 것은 노래다. 음악을 듣는 것은 좋아하지만 노래를 부르는 것은 별로 즐기지 않았는데, 아기와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절로 노래가 나온다. 내가 기억하는 동요가 이렇게 많았다니, 놀라기도 하고 내가 어린 시절에는 없었던 새로운 동요를 알게 되기도 한다. 괜히 몸이 무거운 날에는 노래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한결 가뿐해진다. 아기를 키우면서 알게 된 수많은 기쁨 중의 하나이다.
한참 그렇게 놀다 보니 부모님이 퇴근하고 오셨다. 아기도 새로운 인물의 등장을 제법 반기는 눈치이다. 남편이 다시 서울로 발령이 났으니 친정살이도 슬슬 끝나간다. 오래 비워둔 신혼집에서 다시 시작할 우리의 생활이 기대되기도 하고, 그동안 받았던 도움 없이 잘 해나갈 수 있을지 두렵기도 하다. 그래봤자 차로 20분 거리이니 여차 하면 언제든 올 수 있다. 엄마가 해주신 밥을 먹고 만든 모유로 아기를 지금까지 키웠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이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아기는 쑥쑥 자랐다. 이 작은 생명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지를 생각하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주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들을 아기에게 받고 있다.
엄마가 만들어주신 저녁밥을 맛있게 먹고, 아기 목욕을 시키고, 엄마가 아기를 봐주시는 동안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나와서는 졸음과 배고픔을 호소하는 아기를 얼른 받아 안았다. 목욕을 하니 다시 생기를 찾길래 얼른 씻으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방으로 들어와 옷을 걷어 올리니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 문다. 그 모습이 기특하고 예뻐서 나는 또 한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두 번의 외출로 피곤했는지 입은 오물오물 움직이면서도 눈은 감긴지 오래다. 만족스럽게 잠든 아기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오늘도 참 좋은 하루였다.
이런 하루가 드문 것은 아니지만, 오늘은 왠지 적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기를 눕힌 뒤 노트북을 열었다. 첫 단락을 다 써갈 때쯤 깨서 우는 아기를 다시 안아서 재우고 돌아왔다. 이 평범한 하루가 못견디게 그리워지리라는 예감이 이 두서 없는 일기를 쓰게 만들었다. 매일을 소중히 여기고 있지만 – 혹은 그렇기 때문에 – 시간이 가는 것이 너무나 아깝다. 아기의 내일이 기대가 되면서도, 지금을 떠나보내기가 쉽지 않다. 고단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고단함을 잊고도 남을 만큼 사랑스러움이 크니까. 그저 먹이고 씻기고 안아준게 다인데 그것만으로도 비온 뒤의 죽순처럼 쑥쑥 자라주는 것이 신기하고 고맙다. 부끄러워 일 년에 한 번이나 할까말까 하던 사랑한다는 말을 홍수처럼 쏟아붓게 되는 매일. 이 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사랑하는 내 딸은 우리의 이 시간들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그녀의 몫까지 내가 기억하고 또 기록해둬야지.
내일 또 펼쳐질 우리의 완벽한 하루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