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넷째주에 읽은 책

거의 완벽에 가까운 주말을 보냈다. 보고 싶던 영화를 두 편이나 보았고, 읽고 싶던 책도 실컷 읽었다. 양껏 늦잠도 자고, 스릴 넘치는 드라이브를 하고, 사고 싶던 책도 한아름 사고, 늦겨울의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밤 산책도 했다. 한껏 부풀어오른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지난 한 주를 정리하며 이 글을 적는다. 스스로가 어떨 때 행복을 느끼는지를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자주 스스로를 행운아라고 느낀다. 기분이 가라앉는 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자주 슬퍼하고, 자주 열패감을 느끼지만, 그런 감정에 젖을 때마다 스스로를 달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슬플 때는 마음껏 슬퍼하고, 기쁠 때는 마음껏 기뻐하자. 오늘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상투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진부함은 어느 정도 진실을 담보한다. 닳고 헤질 때까지 회자된 이야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나는 종종 ‘아이쿠,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하는 생각을 한다. 무언가 대단한 일이 있어서는 아니다. 이를테면 오늘 나는 천천히 길을 걷다가, 200m 정도 앞 골목에서 갑자기 오토바이가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그 생각을 했다. 긴장할 만큼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다. 아마 그 오토바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을 확률은 희박할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내가 조금만 더 빨리 걸었더라면, 그 오토바이가 조금만 늦게 출발했더라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지나친 상상력일지도 모르겠으나 이런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이 한 줌의 생명과 그로 인해 가능한 이 생활에 진심으로 감사하게 된다. 오늘 죽음을 가까이 느꼈을 때 다행히 나는 무척 만족스러운 상태였고, 아쉬움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만약 죽음 뒤에도 의식이 존재한다면 이런 상태에서 죽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월의 네 번째 주도 좋은 한 주였다.

다 읽은 책

  1. 테리 이글턴,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 1월 언젠가에 산 책을 2월의 끝자락에 다 읽었다. 한 권의 책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일이 가능할까? 물론 나는 가능하다고 믿는다. 나는 테리 이글턴의 친근하면서도 날카로운 글을 통해, 그동안 내가 맹목적으로 사랑해온 문학을 좀 더 ‘정확하게’ (분명히 밝혀두건데 여기서의 ‘정확하다’는 형용사는 신형철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쓴 모든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 노신사(?)와도 사랑에 빠진 것 같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사람의 ‘글’과 사랑에 빠졌다고 해야겠지만.
    • 영화 <컨택트>를 본 이후로 나는 언어와 사고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생각은 선형적으로 전개되기보다는 산발적으로 떠올랐다 흩어지는 것이라 아직 어떤 형태를 갖추지는 못했으나 나의 무의식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읽기 시작한 이 책은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읽을 때 더욱 각별하게 다가왔다. 저자는 문학 읽기의 다양한 요소(도입부, 인물, 서사, 해석, 가치)에 대해 미시적 관점과 거시적 관점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독자를 안내하지만, 그 안에서 결코 놓치 않는 끈은 문학 안에서의 언어의 위상이다. 일상 언어가 도구라면, 문학 언어는 내용 그 자체이다. 단순히 내용을 담기 위한 그릇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이미 내용물인 것이다.
    • 근 400 페이지에 이르는 이 책에서 저자는 수많은 질문을 던지지만 결코 하나의 답을 강요하지는 않으며 다른 가능성을 향한 문을 열어둔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의 주장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지도 않는다. 놀라운 균형감각이다. 무엇보다 잔 가시가 많은 생선 뼈를 발라내듯 섬세하게 작품을 해석해내는 능력은 탁월하다. 비록 그가 인용한 대부분의 작품은 영미문학(간혹 스탕달이나 카프카 같은 대륙의 작가들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서구권에 한정되어 있다)에 집중되어 있긴 하지만, 문화권을 초월해 모든 종류의 문학 읽기에 적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물론 그 ‘보편성’을 어떻게 각각의 ‘특수한’ 작품과 무엇보다 언어에 적용시킬지는 온전히 작품을 읽어나갈 독자의 몫이겠지만 말이다.
    • 더불어 이 책으로 인해 – 그리고 내가 추천하자마자 이 책을 구입한 추진력 있는 친구 덕분에 – ‘책 읽는 수요일’이라는 출판사를 관심 있게 보게 되었다. 이번 주에 절반쯤 읽은 <일의 기본, 생활의 기본 100>, 그리고 이번 주에 구입한 테리 이글턴의 <인생의 의미> 역시 이 출판사의 책이다. 믿고 보는 출판사가 많아지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2.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아마도 편혜영이었던 것 같은데, 북바이북에서 있었던 <홀>의 작가 번개에서 좋아하는 소설에 대해 물었을 때 이야기한 것을 기억해 두었다가 얼마 전 북티크에 갔을 때 마침 있길래 구입했다. 물론 내용이 중요하지만, 기왕 읽을거면 – 게다가 책장에 꽂아둘 거라면 – 예쁜 책이 좋다. 중요한 학술 서적을 많이 펴내지만 디자인 감각은 여전히 90년대 초반에 머물러 있는 ‘까치’ 출판사의 책이라 장바구니에 담아두고도 계속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북티크에서 발견했을 때도 역시 사고 싶은 마음은 별로 들지 않았지만 이러다 영영 이 책은 안 읽겠구나 싶어 구입했다. 그러고도 한참 손이 가지 않아 꽂아 두었다가, 어제 집을 나서면서 집어 들고 나왔다. 그리고는 이 책을 구입한 바로 그곳에서 서너 시간 동안 바짝 집중해서 다 읽었다. 훌륭한 작품이어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고, 좋아하는 작품이어도 훌륭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책은 굳이 따지자면 전자에 해당한다. *테리 이글턴도 위에 소개한 책에서 비슷한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예술 작품을 즐기는 것과 경탄하는 것은 다릅니다. 경탄하지 않는 책을 즐길 수 있고, 즐기지 않는 책을 경탄할 수도 있습니다.” (<문학을 읽는다는 것>, 347쪽)
    • 본디 제법 시간차를 두고 따로 출간된 세 권을 번역하면서 한 권으로 묶어 펴낸 이 책은 우선 세 부(원래대로라면 세 권)의 문체가 도드라지게 다르다. 아마 이렇게 묶여 있지 않았더라면 연속된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정도로 다르다. 전쟁으로 인해 뒤틀려버린 쌍둥이 형제의 엇갈린 운명에 대한 이야기인 이 책은 여느 전쟁 이야기들처럼 충격적이고 다소 불쾌한 에피소드로 가득하다. 거의 천진하기까지한 담담한 문체는 충격을 배가시킨다. 그러나 너무 다른 시대를 살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너무나 소설적인 인물이어서일까, 주인공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물론 모든 소설의 주인공에 다 감정 이입을 하거나 그들을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이들의 이야기는 지나치게 비틀려 있어 오히려 평면적으로 다가온다. 주인공들보다는 주변 인물들이 오히려 주의를 잡아 끈다. 형식 면에서는 1부에서는 일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고, 그것의 진실성 여부가 후반부의 서사를 이끄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점에서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를 살짝 떠올렸다. 물론 그 점을 제외하고는 이 두 소설은 무척 다르다. 문학사적으로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더욱 높게 평가될지라도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나를 찾아줘> 쪽이 훨씬 더 매력적이다.
    • 두 번 읽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한 번 읽을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본디 세 권이었던 책을 한 권으로 묶어 펴낸 출판사의 결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유감스럽다. 물론 세 권이 한 권이 됨으로써 비용 면에서는 훨씬 부담이 줄게 되었을지 모르나, 세 권을 따로 읽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경험을 독자에게서 빼앗아 가버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독서 경험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지나친 개입이었다. 물론 두 경우를 비교해보았을 때 이쪽이 더 좋았을 수도 있으나 그것은 이제 나로서는 영영 알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이미 한 권으로 읽어버렸으니 말이다.

끊어 읽은 책

  1. 마쓰우라 야타로, <일의 기본, 생활의 기본 100>
    • 직장 내에서 벌어진 갈등으로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로 출근한 아침, 사무실에 갖다 둔 이 책을 꺼내어 단숨에 읽었다. 기본 중의 기본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의외로 잘 생각하지 못하는 내용들도 있어 귀퉁이를 접어가며 읽었다.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책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저 읽는데서 끝나서는 읽지 못한 것만 못한 책일 수도 있으나 잠언처럼 옆에 두고 한 번씩 들춰볼 만한 책이다. 몇 가지는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려 애쓰고 있다. 이를 테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열 명이라면, 싫어하는 사람도 열 명” 이나 “자기 전에 아침 얼굴 만들기” 같은 것.
  2. 김남주, <사라지는 번역자들>
    • 역시 첫인상은 좀처럼 틀리지 않는다. 잡지 <어라운드>의 인터뷰에서 처음 알게 된 그녀에 대한 인상 – 은근하고 진중하며 섬세한 – 은 그녀의 책을 읽고도 변하지 않았다. 그녀의 문장은 시인의 것과도 소설가의 것과도 다르지만 특유의 멋이 있다. 일부러 멋을 부리지는 않지만 단정하고 정갈하다. 한마디로 믿음직스러운 문체다. 앞으로 그녀가 번역한 책이라면 읽어볼 것도 없이 사버려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신뢰감을 주는 문체. 그것은 아마 번역이라는 자신의 업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 문학을 향한 순정한 마음이 문장 안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분야든 한 가지를 뚝심 있게 지속해온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감동적인 일은 없다. 그녀의 이야기에는 그런 잔잔한 힘이 있다.
  3. 서윤후,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 김소연 시인의 <수학자의 아침>이라는 시가 갑자기 읽고 싶어져서 구글에 검색해 들어간 곳이 서윤후 시인의 블로그였다. 처음에는 그가 시인인 줄도 몰랐는데, 블로그를 구경하다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여느 블로그와 마찬가지로 일상의 기록이 주를 이루는데, 그 기록을 이루는 문장들이 심상치 않다. 시인다운 문장이었고, 읽기만 해도 배부른 문장이었다. 그래서 그날 바로 서윤후의 시집을 찾아서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는데, 왜인지 사지는 않고 있다가 얼마 전 서점에서 손이 닿아 구입했다. (엄밀히 말하면 일부러 사기 위해 찾아보았으니 ‘손이 닿았다’는 표현은 틀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동안 책꽂이에 꽂혀 있다 얼마 전부터 자주 오고 있는, 시인과 이름이 같은 윤후라는 아이를 볼 때마다 이 책이 생각나서 출근 길에 들고 나와 읽었다.
    • 맘에 드는 시가 몇 편 있다. 농익지는 않았으나 간혹 소년다운 앳됨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싯구가 매력적이다. 조금 더 읽어봐야겠다.
  4. 마르쿠스 가브리엘,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1. 인터넷 서점에서 광고하는 것을 보고 흥미로울 것 같아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가, 지난 주에 서점에 갔을 때 조금 읽어보고는 바로 구입했다. 이제 1장을 다 읽고, 막 2장에 들어간 참이다.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라니, 애초부터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는 질문이다.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데, 왜 그럴까? 하고 묻는 것이니까 말이다. 저자의 주장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칸트가 이야기한 물자체(物自體)로서의 세계, 그러니까 세계 그 자체로서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고, 여러 가지 독립적인 영역의 세계들이 함께 공존하는, 일존의 영역들의 영역으로서의 세계만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렇게 적고 보니 무척 복잡하다. 나는 1장까지 읽고서 세계란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하나의 전체가 아니라, 각각의 영역이 각자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것이라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는데, 이 생각은 무척 매력적이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을 때면 그 다양한 스펙트럼에 이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가 왕왕 있다. 이를 테면 이번 주에 본 두 편의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와 <매기스 플랜>은 감정선과 깊이에 있어 양극단에 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 두 가지 이야기가 비슷한 시기에 동시에, 하나의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상상하면 굉장한 이물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각각의 서로 다른 세계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 이물감은 순식간에 해소된다. 여기 적은 것은 무척 초보적인 수준이라 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읽어가며 생각을 정리해야 겠지만, 어쨌든 철학책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흥미진진하고 매력적인 책임은 분명하다.

산 책

  1. 황인찬, <희지의 세계>
  2. 이성복, <불화하는 말들>
  3. 김소연, <눈물이라는 뼈>
  4.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5.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6. 테리 이글턴, <인생의 의미>

(모두 강남 교보문고)

 

그 밖의 읽기

“Anthony Bourdain’s Moveable Feast”, by. Patrick Radden Keefe, from The New Yorker Magazine.

2월 셋째주에 읽은 책

몇 번이나 쓰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도무지 글이 써지지가 않았다. 겨우 지난주인데 벌써 까마득해져서, 막상 쓰려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문장을 억지로 쥐어 짜내는 기분이 썩 내키지 않았다. 아마 나의 고질병인 완벽주의가 도져서, 또 잘 쓰고 싶었나보다. 편하게 기록하고자 시작한 일이 어느새 부담이 되어버렸다. 약간의 부담을 느끼는 것은 나쁘지 않다. 조금은 강제적으로라도 꾸준히 기록을 이어가는 일이 하나 둘 쌓이면 그것만으로도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을, 요즘 들어 여러 번 실감했으니. 그 순간이 아니면 지나간 기록에 무언가를 덧붙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더 부담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괜히 잘 쓰려고 애쓰지 않고, 그저 지난주에 읽은 것들을 담담하게 적어보련다. 어차피 누구를 보여주려고 쓰는 글이 아니라, 내가 기억하기 위해서 쓰는 글이니까.

 

다 읽은 책

1. 마스다 무네아키, <지적자본론>
  • 예전부터 존재는 알고 있었으나 그리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제목 탓에 늘 지나쳐왔는데, 친구와 함께 서점에 간 날 갑자기 눈에 들어와 살까말까 고민하고 있었더니 이미 이 책을 읽은 친구가 이 좋은 책을 아직도 안 읽었냐며 타박 아닌 타박을 주기에 멋쩍은 마음에 집어들고 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늘 그렇듯 그녀의 추천은 옳았다.
  • 책을 읽고 나니 다이칸야마 츠타야에 너무너무 가고 싶어져서, 도쿄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사실은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주 목적이지만, 그에 못지 않은 중요한 핑계가 생겼기 때문에. 요즘 하고 있는 이 ‘기획’이라는 일에 대해 총체적으로 새롭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분명 한 번 읽고 말 책은 아니다.
2.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의 힘
  • 작년, 아니 재작년부터 나의 큰 화두 중 하나가 바로 ‘휴식’이다. 잘 쉬는 것이 열심히 일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은 예전부터 느끼고 있었는데, 많은 시간만큼 스트레스도 많은 대학원 생활과 졸업 후의 프리랜서 생활을 겪으면서 휴식이 더욱 절실해졌다. 그래서였을까, 작년 말에 또 광화문 교보문고를 어슬렁거리다가 왠지 이 책이 눈에 들어왔는데 별로 읽어보지도 않고 그냥 사버렸다. 사실 나는 이런 식으로 책을 충동구매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성공률이 제법 높은 편이다. 이 책 역시 그렇게 고른 책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저널리스트가 쓴 책 답게 아주 전문적으로 깊이 들어가지는 않아도 핵심적인 내용들이 잘 정리되어 있으며 술술 읽힌다. 특히 가속화된 사회에서의 시간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은 무척 흥미롭다.
  • “달리는 정지 상태”는 계속 시간에 쫓기는 사회에서는 뿌리 깊은 진정한 변화가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뜻이다. 겉으로는 달리는 것만 같은데 사실은 멈춰 있는 셈이다. 동시에 모든 사람은 극도의 긴장감에 시달린다. 끝 모르는 가속화는 개별 기업에게 더욱더 높은 압력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을 착취하고 혹사시킬 수밖에 없다. (186쪽)

  • 예전처럼 기술의 발전을 이용해 사회 발달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대신, 현대 후기는 그때그때 일어나는 역사적 변화가 아무런 방향 없이 통제할 수 없는 지경으로 빠지고 말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현대화의 핵심이었던 가속화 과정은 이로써 원래의 목표로부터 한참 어긋나고 말았다. “성장과 가속이 약속해주던 원래의 행복은 갈수록 빛이 바래면서 개인과 집단의 자율성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저주가 되고 말았다.” (191쪽)

  • 진정한 휴식을 즐기는 법에 대한 소소한 팁들도 나와 있기는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흥미유발용 건강 기사에서 접할 법한 내용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면 아마도 다양한 분야의 전문적인 연구 성과들을 적극적으로 끌고 들어와 사회 현상을 제법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독일인 저자가 2010년에 펴낸 이 책은 그로부터 약 2년 뒤에 출간된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연상시킨다. 하나는 과학에서, 하나는 철학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이 다를뿐, 이 두 책을 관통하는 중심 주제는 거의 완벽히 일치한다. 현대의 자본주의 시스템은 끊임없이 개인들이 스스로를 착취하도록 몰아가고 있으며,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로부터 잠시 거리를 두는 시간 – 한병철은 이를 ‘무위’라 표현하였고, 울리히 슈나벨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라 풀어서 이야기했다 – 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큰 틀에서 보면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몰입>과도 깊이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다. (실제로 울리히 슈나벨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의 힘>에서 <몰입>의 내용을 휴식의 방법 중 하나로 제법 비중 있게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내용일지라도 실천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번 주에 특히 휴식에 목말라 있었는데 ‘제대로’ 쉬는 것은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 여담이지만 이 책은 같은 출판사에서 2011년에 출간된 <휴식>의 개정판이다. 그리고 나는 그 <휴식>이란 책이 나온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강남 교보문고에서 보고 조금 읽고 나서 살까말까 고민하다 결국 사지 않은 것을 뚜렷이 기억한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보았다. 대학원에 들어가고 난 뒤에는 심지어 인터넷으로 살까말까 고민한 적도 있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소위 말하는 ‘자기계발서’에 대한 편견이 심했고, 또 지금보다 훨씬 더 읽는 속도보다 빠르게 책을 사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에 고민 끝에 결국 내려놓았던 것이다. 그랬던 책을 이렇게 우연히 다시 만나서 결국 끝까지 읽었다. 별 것은 아닐지라도 재미 있는 우연이다.
끊어 읽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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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르쿠스 가브리엘,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2. 임승유,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3. 테리 이글턴,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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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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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치오 카쿠, <마음의 미래>
2. 버트란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3. 마르쿠스 가브리엘,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4. 아즈마 히로키, <약한 연결>
5.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6. 이성복,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7. 진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8. 페이건 케네디,  <인벤톨로지: 불평가, 문외한, 몽상가, 낙오자, 불법거주자, 눈엣가시들의 역사>
9. 패트릭 라일리, <원 페이지 프로포절>
* 1~5 광화문 교보문고, 6~7 북티크, 8~9 반디앤루니스 강남신세계점.

2월 둘째주에 읽은 책

열흘만의 포스팅. 2월의 두번째 주는 순식간에 흘러갔다. 책을 거의 읽지 못했지만, 못 읽은 만큼 많이 샀다.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일을 드디어 끝내고, 새로운 일을 하나 또 벌이기로 했고, 출퇴근을 시작한지 한 달 반만에 처음으로 조퇴를 하고, 비행기 티켓을 하나 끊었다. 영화를 한 편 보았고, 하루는 좋아하는 친구와 아침부터 밤까지 꼬박 14시간을 함께 보냈다. 일을 하는 이유와 궁극적으로 만들고 싶은 지점이 조금씩 뚜렷해지고 있다. 어렵지만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니 즐거움이 크다. 아이들은 거의 매일 같이 사랑한다는 말을 해준다. 살면서 이렇게나 많이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시기가 있었나. 연애할 때보다 더 많은 “사랑해”를 받고 있다. 이렇게 돌이켜보니 여러모로 행복하지 않을 수 없는 나날들.

다 읽은 책

오은, <유에서 유>

  • 이 주에 다 읽은 책은 시집 한 권이 다다. 출퇴근을 하며 야금 야금 읽었던 시집의 마지막 장을 덮은 것은 아마도 화요일이었는데, 그 뒤로 거의 책을 읽지 못했다. 수도 없이 밑줄을 그으며 읽었다. 시집을 읽으며 처음으로 소리내어 웃어보았다. 오은이 단어를 다루는 방식은 무척이나 능청스럽다. 젠체하지 않으며, 구태여 난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직접적이지는 않고, 흥겨운 말놀이 속에는 가끔 훅 찌르고 들어오는 구절이 있어 방심하던 차에 뜨끔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 한 권을 읽는 내내, 나는 그의 재기발랄한 단어 감각에 매료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시집을 덮고 나니 가장 뇌리에 깊숙이 박힌 것은 평범하디 평범한 단어들로 이루어진 다음의 연이었다.

개가 한 마리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보는 개

개도 나를 처음 봤을 것이다

– <계절감> 중에서

  • 제일 처음에 실려 있는 <계절감>이라는 이 시는 여름과 가을 사이, 계절이 바뀔 때의 서늘한 감각을 몇 가지 소재들로 이루어진 장면으로 구성해 보여준다. 그 중 ‘개’는 시적 화자인 ‘나’와 대비되며 묘한 긴장감을 조성하고 시에 균형을 잡아준다. 3연에서 서로 처음 만난 ‘개’와 ‘나’는 4연에서 서로를 스치고 훑으며 견제한다. 그리고는 잠시 떨어졌다, 6연과 7연에서 다시 대칭을 이룬다.

땀을 흘리는데도

개는 가죽을 벗지 않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

땀을 흘리는데도

나는 외투를 벗지 않고 있었다

어찌하지 않은 일

– <계절감> 중에서

  • 사실 이 시에서 ‘개’의 의미에 대해 찐하게 논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럴 능력도 안 되고. 다만 내가 이 구절이 계속해서 떠오른 것은 아주 간단하지만 쉽게 놓치는 어떤 발상의 전환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 아니, 나는 — 일단 개을 보았을 때 1) 저 개는 처음 본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으며, 따라서 2) 저 개도 나를 처음 보겠구나 하는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는다. 이것은 나는 늘 스스로 ‘보는’ 주체인 동시에 누군가의 시선에서 – 설령 그것이 인간이 아닐지라도 – ‘보여지는’ 객체가 될 수 있다는, 주체와 객체에 대한 인식이 전복되는 순간을 우아하게 묘사한 구절이라 마음이 끌렸다.
  • 2주째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는 테리 이글턴의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의 도입부가 떠오른다. 문학을 다른 글과 차별화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 내용과 형식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라는 것. 학부 시절 미학을 공부하면서 시선의 문제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고찰한, 한 단락을 이해하기 위해 꼬박 세 시간을 이야기해야 하는 글들을 여러 편 읽었지만 한번도 그것을 나의 감각으로 받아들여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 짧은 시는 그 ‘내용’과 ‘형식’을 훌륭하게 결합하여, 아마도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뚜렷한 인상을 남겼다.
  • 그 외에도 이 시집에서 좋았던 구절은 수도 없이 많다. 하도 접어서 책의 두께가 두 배는 된 것 같다. 안타깝게도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 책이 곁에 없어 이 정도로 줄이고 넘어간다. 그러나 머지 않아, 그것도 꽤 자주 다시 찾게 될 것임을 확신한다. 오은의 나머지 두 시집은 이미 책장에 자리를 잡았다.

읽고 있는 책

읽고 있는 책 코너는 이번주에는 쉽니다. 조각조각 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잠들기 전의 찰나에 몇 페이지 읽고 만 정도라 맨 정신에 다시 읽어야 할 것 같아서 패스.

산 책

  1.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끝과 시작>
  2. 브레네 브라운,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
  3. 김남주, <나의 프랑스식 서재>
  4. 오은, <호텔 타셀의 돼지들>
  5. 장 폴 사르트르, <말>
  6. 신경숙,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7.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8. 제프 다이어,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
  • 1-4는 인터파크도서, 5-8 북티크 서교점에서 구입.
  • 1-4는 오은 시집을 다 읽은 날, 오은의 <호텔 타셀의 돼지들>을 사고 싶어서 가장 많이 이용하는 인터넷 교보문고에 들어갔다가 품절 표시가 뜬 것을 보고 조바심이 나서 다른 곳을 뒤져서 구입했다. 같은 경로로 들어오게 된 것이 브레네 브라운의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 교보문고 뉴스레터였나, 여성 지식인 어쩌구저쩌구 특집에서 소개된 저자들 중에 평소에 관심 있던 에이미 커디가 들어 있어 그 특집 중 다른 사람들이 쓴 책도 함께 찾아보았는데, 그 중 브레네 브라운이 있었다. 그녀의 책 중에 가장 궁금했던 것이 이 책이어서 장바구니에 넣어뒀는데 역시나 품절 표시가 떴길래, 괜히 마음이 급해져 그김에 주문. 쉼보르스카와 김남주는 사실 무슨 기준에서 선택된 것은 아니었다. 쉼보르스카는 김소연 시인의 <시옷의 세계>를 통해 처음 접한 후 먼저 유고시집 <충분하다>를 통해 만났다가, 얼마 전 읽은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에서 또 언급이 되어 뇌리에 박혀 있었다. 언젠가 사야지 하고 있던 것을 드디어 샀달까. <나의 프랑스식 서재>는 말할 것도 없이 얼마 전 구입해서 읽고 있는 <사라지는 번역가들> 때문에 구입했다. 김남주가 번역한 책들을 본격적으로 읽어보기 전에, 그녀가 쓴 옮긴이의 말들을 한 데 모아둔 이 책을 먼저 읽어보기로 했다.
  • 5-8은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공간인 북티크에 친구와 함께 갔다가 충동적으로 구입한 것들. 사르트르의 <말>은 김남주의 <사라지는 번역가들>에 소개된 것을 보며 읽고 싶어져서, 신경숙은 같이 간 친구가 그날 가져와서 읽은 책이었는데 너무 좋다며 꼭 읽어보라고 추천을 하기에,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편혜영인가 김금희인가, 작가 번개에서 저자가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로 꼽아서 전부터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다가 표지가 마음에 안들어 안 사고 있었는데 이렇게 미루다가는 평생 안 읽겠다 싶어 눈에 들어온 김에,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는 지난 번에 북티크에 왔을 때 발견하고 마음에 들어서 살까말까 고민했는데 이번에 갔을 때도 아직 있길래, 역시나 이번에 안 사면 이 책과 다시 스칠 일은 없겠다 싶어 구입했다.

2월 첫째주에 읽은 책

설을 보내고 나니 1월도 다 가버렸다. 시간이 가는게 무섭게 빠르게 느껴지다가도, 지난 한 달 동안 있던 일들을 돌이켜보니 겨우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한 달을 세 달처럼 살았다. 그게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대로 열심히 살았다는 뜻일 수도 있겠지. 사실 이런 시간감각이 그리 낯설지는 않다. 재작년 하반기에서 올해 초까지, 내 인생에서 제법 임팩트 있는 사건들이 촘촘한 간격을 두고 일어나, 되짚어볼 때마다 깜짝 놀라곤 했다. 삼 년은 지난 것 같은데, 겨우 세 달전 일이라니! 하면서.

지지난 주에 쓴 글을 보니, “아무리 바빠도 한 주에 책 한 권도 다 못 읽는 건 슬프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번 주에 와서는 그런 생각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책 한 권도 책 한 권 나름이다. 한 권을 다 끝내지 못하고 여러 권을 짧게 끊어서 읽었더라도 그것이 밀도 있는 독서였다면 한 권의 느슨한 독서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은 아닐까? 어디에 더 중점을 둘 것이냐도 결국은 스스로의 선택에 달린 문제인데, 나는 늘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하는 데 있어 양과 질 사이를 갈팡질팡 오간다. 두 가지를 다 달성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겠지만.

이번 주에는 여러 책들을 끊어 읽었고 한 권을 다 읽었다. 그리고 또 새로 네 권의 책을 들였다. 그리고 큰 맘을 먹고 책장을 대대적으로 정리했다. 다시 펼치지 않을 것 같은 책들은 과감하게 책장에서 빼내고, 새로 산 책들 위주로 책상에 가까이 꽂았다. 졸업한 이후로 한 번도 책장을 넘긴 적 없는 전공 서적들도 과감히 빼내어 먼 책장으로 옮겼다. 일부는 아예 처분을 할까 고민하고 있다. 언젠가는 읽겠지, 하는 마음으로 갖고 있던 책들도 이제는 보내줄 때가 된 것 같다. 훗날 퍼뜩 어떤 계기로 다시 들이는 날이 올지라도. (물론 그때 가서 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 오래도록 끌어 안고 있게 되는 원인 중 하나지만.) 이중으로 꽂혀 있던 책꽂이들이 한결 가벼워지자 마음도 덩달아 가뿐해졌다. 오래도록 다른 책들 사이에 가려져 있던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도 다시 책등을 드러냈다. 오래되어 책등이 바랬지만 여전히 처음 이 전집이 책장에 꽂혔을 때의 설렘이 생생하다. 그 사이 몇 권은 자취를 감추었다. 대개는 누군가에게 빌려준 뒤 빌려주었다는 사실도 잊은 채로 한참이 지났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빌려줄 때는 늘 준다는 마음으로 빌려주기 때문에, 그중 정말 간직하고 싶은 책은 돌아오지 않으면 미련 없이 다시 산다. 하지만 요즘 들어 독서 습관이 바뀌어서 밑줄도 긋고 귀퉁이도 접으며 읽는데, 그렇게 읽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책이 사라진다면 역시 조금 슬플 것 같다. 그런 책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사람에게만 빌려줘야겠다.

새삼스러운 결심을 뒤로 하고, 이번 주에 읽은 책들 이야기로 넘어가자.

 

다 읽은 책

장강명, <그믐: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내가 장강명을 처음 알게된 것은 소설 <한국이 싫어서> 였다. 집에 오는 길에 들른 서점에서 발견하고는 단숨에 읽어버렸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다 읽어버린 탓에 살까, 하고 잠시 고민하다 다시 내려두고는 딴 책을 사들고 집에 왔더랬다. 주인공에게 고스란히 감정 이입을 할 수 있을 만큼 섬세하게 묘사된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남자 작가가 쓴 책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주인공(여자)의 심리가 잘 표현되어 있어 놀라웠다. 신작이 줄줄이 쏟아져 나온 것은 알았지만 왜인지 별로 손이 가지 않아 한동안 있고 있었다가, 친구가 최근에 <한국이 싫어서> 를 읽었는데 참 좋더라, 하기에 다시 생각이 나서 지난 주에 서점에 갔을 때 <그믐>을 사 왔더랬다.
  • 장강명의 수 많은 소설 중에 왜 <그믐>을 골랐을까? 아마도 제목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믐>이라는 단어가 주는 아스라한 울림도 좋았지만, 그 뒤에 붙은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라는 부제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세 개의 단어로 구성된 각 장의 제목들도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다 읽고 난 뒤의 감상은, ‘나쁘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좋지도 않았다.’
  • 세 인물의 이야기가 어지럽게 얽힌다. 대부분이 대화로 구성되어 있으나 큰 따옴표는 없어 평서문과 구별되지 않는다.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서는 켄트 하루프의 <밤에 우리 영혼은>도 이 독특한 표기법을 따르고 있다.) SF 적인 신비로운 요소도 있으나 날카로운 현실 또한 공존한다. 과하다 싶을 정도의 많은 요소들을 부담스럽지 않게 버무려낸 것은 분명 작가의 능력이다. 그러나 왜인지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미 많은 다른 글을 읽고 난 뒤에 읽어서 받아들일 정서적인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저 나의 취향에는 맞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
  • 제 20회 문학동네 작가상 수상작인 이 책의 뒤에는 심사평과 수상 소감이 함께 적혀 있다. 심사평의 온도는 다양했는데, 한없이 찬탄에 가까운 뜨거운 열광의 다른 쪽 끝에는 다소 냉담한 평가도 있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위치한 심사평들 중에는 유독 ‘처음 읽었을 때는 갸우뚱했으나, 다시 읽어보니 과연 수상작 답더라’는 내용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그래서 나도 한 번 읽은 것으로 결론을 내기 보다는, 묵혀두었다 다시 읽어보려 한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 소설쓰기를 전장에 비유한 작가의 수상소감 역시 인상적이었다.

 

끊어 읽은 책

  1. 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 서교동 북티크에서 책을 사온 그날 밤에 펼쳐 읽은 뒤로 한참만에 다시 읽었다. 역시나 질투가 날 만큼 정교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한다. 두루뭉술하게 갖고 있던 이미지들을 날카로운 칼로 발라내어 정갈한 표현으로 들이미는 문장. 그 문장을 거치면서 막연한 이미지는 정확한 언어가 되어 새로운 감각을 깨운다. 좋은 글은 그렇게 없던 감각도 생기게 만든다. 그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존재하게 된다. 보이지 않았던 것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진다.
    • 신형철이 쓴 시인, 그리고 시 이야기를 읽고 있으니 읽고 싶은 시, 알고 싶은 시인이 자꾸만 늘어났다. 덕분에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는 또 포화상태. 김소연의 <시옷의 세계>로 처음 발을 들인 시의 세계를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가 손을 끌어 인도해주는 느낌이랄까. 난해함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으나 전보다는 훨씬 더 가까워진 것 같다.
  2. 오은, <유에서 유>
    • 오은의 시집 역시 같은 날 북티크에서 사왔다. 한 편씩 아껴 읽다 그만 찻물을 쏟아 못쓰게 된 시집을 얼마 전에 다시 샀다. 환승이 잦은 출근길에 산문을 읽으면 흐름이 자꾸 끊기다 보니 시나 읽어볼까, 하고 들고 나왔다. 이 시집의 앞날개에는 오은의 시를 ‘말놀이’에 빗댄 글이 실려 있다. 시를 읽어보면 과연 그렇구나, 싶다. 간결하고 명쾌한 방식으로, 말놀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아이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직접적이지만 결코 억지스럽지는 않다. 풉, 하고 웃음이 터져나오는 싯구가 있는가 하면 몇 번이고 곱씹게 되는 묵직한 울림도 만나게 된다. 맘에 드는 구절이 너무 많아서 접고 접고 또 접었다. 시를 읽어볼까, 생각하는 사람에게 추천하기에도 부담 없는 선택이 될 것 같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3부까지 읽었다.
  3. 김남주, <사라지는 번역자들>
    • 베테랑 프랑스문학 번역자인 김남주의 에세이집. 마음산책 블로그에서 출간 소식을 처음 접한 뒤부터 계속 읽고 싶었는데, 지난 주에 드디어 구입해서 이번 주에 조금 읽었다.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잡지 어라운드와의 인터뷰에서였는데, 짧은 인터뷰에서 전해져오는 깊이감이 좋았다. 당연히 편집을 거쳤겠지만 그녀가 구사하는 문장들도 좋았다. 번역은 늘 짝사랑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 에세이가 나에게는 특히 각별하다. 자기 전에 읽기 좋은 책이라 조금씩 아껴 읽고 있다.
    • 책을 읽다보니 장 그르니에와 사르트르와 로맹 가리를, 기왕이면 김남주의 번역으로 읽고 싶어졌다. 이렇게 또 장바구니에 담을 책은 늘어만 간다.
  4. 울리히 슈나벨,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의 힘>
    • 작년 말,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산 책이다. 작년 내내 뭘 하는 지도 모를 정도로 바쁘게 지내다 보니 제목에 끌렸던 것 같다. 그래놓고 한동안 잊고 있다, 내내 긴장상태로 지난 한 주를 보내고 나니 갑자기 이 책이 절실해졌다. 지난 주 금요일 퇴근하고 나니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손가락을 가눌 힘도 없었다. 이번 주에 이미 감기 때문에 운동을 하루 못 간 터라, 이날은 꼭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간단히 요기를 한 뒤 운동을 가려고 짐을 챙기면서 이 책을 함께 넣었다. 집 앞 패스트푸드 점에서 햄버거 세트를 먹으면서 (그렇다. 운동 가기 직전에 무려 햄버거를 먹었다. 채하지 않도록 꼭꼭 씹어 먹었다.) 이십 분 정도 읽었는데, 놀랍도록 충전이 되었다. 머리도 맑아졌을 뿐더러 없던 기운이 갑자기 솟아났다. (물론 햄버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만.) 겨우 한 장(章)을 읽었을 뿐이라 딱히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꽤나 강렬한 경험이었기에 적어 둔다.

 

산 책

  1. WORD SMART 1, 2
  2. 마스다 무네아키, <지적자본론>
  3. 서윤후,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모두 여의도 영풍문고)

 

그 외의 읽기

이번주에는 뉴요커에서 인터넷을 기반으로 새로운 형태의 아트(도저히 ‘미술’이라는 번역어로는 대체할 수 없을 것 같아 싫지만 부득이하게 아트라고 적는다)를 실험하고 있는 젊은 아티스트, Brad Troemel의 기사를 읽었다.

Brad Troemel, the Troll of Internet Art

아티스트라기보다는 어쩌면 기업가에 더 가까운 마인드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무라카미 타카시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물론 그보다는 훨씬 더 반-시장적이고, 친-인터넷적이다. 제도 비평(Institutional Critic)과 초-개념주의(Ultra-Conceptualism)에서 출발했는데 그 어떤 상업적인 예술가보다도 훨씬 더 상업적이다. 다만 그 ‘상업성’이 지향하는 시장이 다를 뿐. ‘순수미술(Fine Arts)’이라는 개념의 환상을 와장창 깨버리는 도발적인 시도에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찬반이 극렬하게 갈리는가 보다. 겨우 기사 하나 읽은 것으로 이러쿵 저러쿵 말하기에는 너무 아는 것이 없어서 뭐라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이렇게 논쟁거리를 만드는 것만큼은 무척이나 ‘예술가답다’고 느껴진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나서서 어그로(?)를 끄는 사람이 있어야 어떤 분야든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스스로가 앞에 나서기에는 영 자신이 없고, 누군가 판을 벌리는 것을 목격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으니 우스운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