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넷째주에 읽은 책

지난 주에는 책을 많이 읽었다. 하지만 글은 거의 쓰지 않았다. 일이 점점 고되게 느껴진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데서 얻었던 기쁨은 그만큼의 고단함으로 되돌아 온다. 보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농도가 옅어진 것은 사실이다. 슬럼프야 언제든 올 수 있는 것이고, 이 정도는 지금까지 겪었던 슬럼프들 중에서는 아주 경미한 수준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스멀스멀 고개를 쳐드는 회의감을 외면할 수는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느라 늘 머릿속이 복잡하다. 도피하듯 책을 읽었다. 일이 힘들 수록 읽고 싶은 책이 많아졌다. 책장들 속으로, 문장들 사이로 그대로 도망치고 싶었다. 어떤 날은 책 속에 숨어 영영 나오고 싶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저버리기에는 책 밖에도 사랑하는 것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 두 세계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생활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차표를 끊지 않고도 도망갈 곳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다 읽은 책

  1. 이원석, <서평 쓰는 법 – 독서의 완성>
    • 송인서적 부도로 인해 작은 출판사들이 입은 피해를 나누자는 취지의 네이버 펀딩에 참여하고 받은 유유 출판사 책 꾸러미에 들어 있던 네 권 중 한 권. 이런 계기가 아니라면 만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뺀질나게 서점을 드나드는 데 구경 한 번 못해봤으니. 여하튼 요즘 내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던 고민 – 단지 읽는 데에서 그칠 것인가? – 과 관련해서 참고할 지점이 많을 것 같아, 오자마자 제일 먼저 꺼내 읽었다. 얇고 가벼워서 출퇴근 길에 단숨에 다 읽을 수 있었다.
    • ‘서평’에 대한 책이기에, 결국 ‘독서’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어떤 책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어떤 서평을 쓸지도 달라지기 때문에. 한 권이라도 더 많이 읽고 싶은 욕심과,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고 싶은 욕심 사이에서 언제나 갈팡질팡하는 나는 늘 어느 쪽도 충분치 못한 것 같아 괴로워한다. 이 책의 저자는 단연코 좋은 서평을 쓰기 위해서는 깊이 읽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책을 나의 독서력 안에 위치시킬 수 있을 만한 넓은 읽기의 경험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한 마디로 넓게도 읽고 깊게도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빤하지만 그래서 더 설득력이 있다. 사실 이 책 한 권을 읽었다고 갑자기 서평을 잘 쓰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서평은 독후감과 어떻게 다른지, 서평을 왜 쓰는지, 더 나아가 왜 읽는지에 대한 저자의 묵직한 고찰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마음이 혹하는 서평집들에 대한 소개는 덤이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서평을 쓰고 싶은 마음보다 앞서 한시 빨리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법>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  김개미,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 오은의 <유에서 유>에 이어 올해 완독한 두 번째 시집인 것 같다. 열 몇 권을 샀는데 겨우 두 권째라니. 시집은 펼쳐 들어도 단숨에 읽게 되지는 않는 것 같다. 모르는 동네를 산책할 때처럼 여기 저기 둘러보고, 가끔은 한참을 한 자리에 멈춰 서서 가만히 들여다보기도 하고, 잰 걸음으로 지나쳐 갔다가 문득 두고 온 것이 떠올라 다시 되돌아 가기도 하고, 그렇게 천천히 나아간다. 김개미의 시집 역시 그렇게 읽었다. 다만 호흡이 가빠지는 것은 생각과는 달랐던, 음침하고 눅진눅진한 그림자 서린 방 같은 이 시집을 조금은 빨리 빠져나오고 싶어서 였는지도 모르겠다. 자꾸만 불길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임승유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임승유의 시어가 불러일으키는 상상이 ‘불순한’ 혹은 ‘불온한’ 것에 가깝다면, 김개미의 시어는 ‘불길함’에 가깝다. 한 권을 다 읽어가도록 희망이라고는 한 자락도 주지 않는데, 그렇다고 해서 마냥 깜깜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기억이 희미해질 때 즈음 다시 펼쳐보고 싶을 것만 같은. 시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 “우리는 누구의 두개골에 고인 백일몽일까” — <봉인된 곳> 중에서.
  3. 수 클리볼드, 홍한별 옮김,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끊어 읽은 책

  • 사이먼 사이넥, 이영민 옮김,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산 책

  1.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3/23, 사당역 반디앤루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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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2016

녹초가 되어 퇴근하던 길에 들른 폐점 시간이 다 된 사당역 반디앤루니스를 한 바퀴 빙 둘러보다가 이 책을 집어들었다. 일하면서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엄마들을 자주 만난다. 만날 때마다 생각이 복잡해진다. 아직은 새하얀 백지 같은 아이들 앞에서 나는 한없이 조심스러워진다. 나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이 아이에게 어떤 결을 남길지 겁이 난다. 잠깐 스칠 뿐인 나조차도 이런데 엄마의 마음은 어떨까. 양육의 무게를 실감할 때마다 아찔하다. 그런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어서, 오랫동안 숙제처럼 남겨두었던 이 책을 읽었다.

아이를 앞세우는 것만으로도 죽음과 비견될 정도로 괴로운 일인데, 그렇게 떠난 아이가 다른 아이들의 목숨을 함께 앗아갔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일이다. 여기 그런 일을 실제로 겪은 엄마가 있다. 그녀는 자기 아이가 초래한 참담한 비극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아이가 저지른 죄와 그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지만, 자신은 여전히 아들을 사랑한다고 이야기한다. 아들을 여전히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비극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고통스러운 기억을 일일이 헤집어가며 책을 썼다.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낼 수 없는 용기다.

이 책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저자의 정체성은 엄마이지만, 내가 뒤로 갈 수록 주목했던 것은 사회운동가로서의 면모이다. 물론 이 두 정체성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수가 비탄 속으로 침잠하는 것을 넘어서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은 딜런 같은 가해자-피해자가 또 다시 등장해서는 안 된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특히 마지막 장의 메시지는 몇 번이고 곱씹어 볼 만하다.

콜럼바인이나 버지니아테크, 샌디훅 같은 참사가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은 ‘왜?’이다.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일 수 있다. 나는 ‘어떻게?’라고 묻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중략) 어떤 일이 왜 일어났는지 설명하다 보면 실행에 옮길 수 있는 해결책 없이 단순한 해답에 안주하고 만다. 이미 고통에 시달리고 있고 자살에 대한 취약성이 있는 사람만이 죽음을 삶의 고통을 끝낼 논리적 해결책으로 떠올린다. 자살은 병의 결과물인데, 마치 좌절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바라보게끔 만드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왜’ 대신에 ‘어떻게’라고 물으면 자기 파괴적인 행동에 빠져드는 과정을 그 자체로 규명할 수 있다. 어떻게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해치는 길에 접어들게 되는가? 어떻게 해서 뇌에서 자기통제, 자기보존, 양심 등의 도구를 사용할 수 없게 되는가? 어떻게 왜곡된 사고를 확인하고 조기에 교정할 수 있을까? 연속체의 여러 지점에서 가장 효과적인 치료방법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어떤 환경에서든 효과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게끔 할 수 있을까?

(중략) 이런 문제들은 긴급한 관심을 요하는 문제들이다. ‘왜’만 물으면 무기력한 상태로 남는다. ‘어떻게’라고 물으면 앞으로 나아갈 길이 보이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다. (440~441쪽)

때로는 ‘왜’보다 ‘어떻게’를 물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내가 어떤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에는 ‘어떻게’라고 묻기 이전에 ‘왜’라는 질문에 철저하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지 일을 시작하고 난 뒤에도 눈 앞의 상황에 대처하는 데 급급해서 본래의 의도를 잊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에, 게다가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커다란 충격을 준 사건이 발생한 뒤에는 ‘왜’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면서 그보다 더 집요하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에 대해 물어야 한다. 그래야 수의 말마따나 그런 결과를 낳게 된 과정의 어느 단계에서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으며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 수 있다.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근래의 국정농단 사태와 세월호를 떠올렸다. 아마도 머지 않은 미래에 역사가 될 – 이미 역사가 되어버린 – 이 두 사건들을 우리는 지금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 충분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묻고 있는가? 아니, 묻는 것에서 더 나아가 답을 내놓고 있는가? 그것이 맞든 틀리든 간에 말이다.

많은 경우에 말의 내용보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을 한 사람이다. 사실 다른 누군가도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열 다섯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스물 세 명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힌 바로 그 가해자이자, 자살로 삶을 마감한 아들의 어머니의 입에서 나오면 받아들이는 사람으로서는 그 무게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책을 읽는 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지만, 다른 어떤 책에서도 느낄 수 없는 묵직한 여운을 얻게 될 것이다.

3월 셋째주에 읽은 책

한 주, 아니 월요일부터 치면 두 주가 지난 후에 쓰려니 기억이 온전치 못하다. 이번 주와 섞여서 기억이 뒤죽박죽이지만 그래도 쓴다. 노트북이 있으면 좋으련만 회사에 두고 와 버렸다. 주중에는 내내 거의 제대로 된 독서를 못하다, 일요일에 몰아 읽었다. 영화도 한 편(<토니 에드만>)보았다. 일을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주말로 문화생활이 몰리지만, 예전의 느슨한 생활에 비해 오히려 밀도 있어 진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나쁘지 않다.

 
다 읽은 책

1. 페이건 케네디, 강유리 역, <인벤톨로지: 불평가, 문외한, 몽상가, 낙오자, 불법거주자, 눈엣가시들의 역사>
2. 편혜영, <재와 빨강>

산 책

1. 편혜영, <재와 빨강>
2.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3. 김애란, <비행운>
4. 마쓰이에 마사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5. 김개미, <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6. 나희덕,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7. 조지 레이코프,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모두 3월 18일 광화문 교보문고

인벤톨로지: 불평가, 문외한, 몽상가, 낙오자, 불법거주자, 눈엣가시들의 역사, 2016

초등학생 시절만 해도 ‘발명’은 결코 낯선 단어가 아니었다. 학교에서는 연례 행사로 발명왕 선발대회가 있었고, 우리는 반쯤은 억지로 짜낸 아이디어로 만든 조악한 발명품들을 제출해야만 했다. 기억에 남는 발명품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니, 천재성이 돋보이는 인상 깊은 발명품은 없었던 것 같다. 중학교에 진학한 이후로도 발명이라는 말을 들을 일은 간간이 있었지만, 여전히 수능 성적이 지배적이었던 입시 제도에서 발명이 설 자리는 좁기만 했다. 게다가 문/이과로 갈라지고 나니 뼛속까지 문과생이었던 나에게 발명은 안드로메다 성운만큼이나 먼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십 년 넘게 살아오다가 덜컥 이 책을 만났다. 발명에 대한 책이긴 하지만 발명이 제목부터 존재감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서점에서 보았을 때도 우선 각양각색의 서체들로 디자인된(*참고로 이 책의 디자인은 워크룸에서 했다) 표지가 눈에 들어왔고, 실생활에서의 필요로 인해 발명된 사물에 대한 예시를 내세운 도입부는 흥미를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게 집어든 이 책을 지난주에서 이번주까지, 출퇴근 길에 읽었다.

읽고 난 뒤의 감상은, 이 책은 발명이라는 특수한 행위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보편적인 사고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발명이란 남들과는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생각할 줄 알았던 사람들이 그것을 실행에 옮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 문장에 쓰인 세 가지 동사가 모두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여기 나온 대로 따라하면 누구나 발명가가 될 수 있다!’는 식의 자기계발서라기보다는 한국어판 제목이 잘 드러내고 있듯이 일종의 역사서에 가깝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연대기적 역사 서술 방식을 따르지는 않지만, 지난 한 세기 남짓한 시간 동안 있었던 두드러지는 발명의 사례들에서 특기할 만한 흐름들을 뽑아내어 장으로 구성했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얻은 가장 큰 통찰이 있다면 ‘디자인’과 ‘디자이너’가 ‘발명’과 ‘발명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경영과 공학, 심지어는 공공 정책에 있어서도 디자인을 이야기하지만 여전히 디자인은 미대에서 가르치는 것으로, 상품의 외양에 직결되는 미학적인 무언가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지적자본론>을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외양을 아름답게 꾸미는 기술만 가지고도 디자이너가 될 수는 있겠지만, ‘좋은’ 디자이너가 되기는 어렵다. 좋은 디자이너라면 기획자인 동시에 발명가여야 한다. 미래를 내다보고, 사람들이 아직 인지조차 못하고 있는 필요를 끄집어 내어 충족시켜주어야 한다. 물론 이런 일은 디자이너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좋은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시각적인 요소를 능숙하게 다루는 것 이상으로 전술한 능력을 갖춰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발명이 에디슨 스타일의 연구소 안에서 대기업 기획자의 감독 아래 이루어지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한 가정이 우리의 사고방식 안에 너무도 깊이 배어 있어 언어 습관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누가 새지 않는 우유 곽 좀 안 만드나.”라고 투덜거릴 때처럼 말이다. 여기서 ‘누구’란 우리 마음을 헤아려줄 엔지니어와 디자이너를 말한다.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 기업을 “생산자”, 일반인을 “소비자”라고 여긴다. (50쪽)

실제로 많은 디자인 학교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필요를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소비자로 생각하도록 교육받는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대다수의 대학생들은 계속해서 똑같은 “발명”을 쏟아 낼 것이다. 맥주 소비량을 늘려주는 장치라든지, 멋진 이성이 주변에 나타날 때 알람이 울리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같은 것을 말이다. 발명가 마크 벨린스키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대학생들은 다른 대학생들을 발명의 표적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있어요. 대학생의 관심사는 연애와 사교죠. 기아, 대기 오염, 건강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아요.” 다시 말해, 많은 학생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나 빈곤 계층을 괴롭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접할 길이 없다. (52쪽)

발명가는 단지 피드백 수집 능력만 있어서는 안 된다. 비판에 귀 기울이되 엉뚱한 문제를 해결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경로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굉장한 자제심이 필요하다. 자기 아이디어에 애착을 느끼고 거기 푹 빠져버리는 대신, 비판을 구하고 열정에 찬물을 끼얹을 사람들을 곁에 두어야 한다. 누군가가 “나는 당신의 아이디어가 필요치 않소.”라고 이야기할 때 그 사람 면전에 마시던 음료를 끼얹는 대신 “그 이유가 뭡니까?”라고 물을 수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창작 과정에서 가장 어렵고도 자존심을 다치기 쉬운 부분이다. (62-63쪽)

자기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은 자신이 저질렀던 실수를 머릿속에서 계속 재연한다. (중략) 성공하는 사람들은 남들이 실수로 인정조차 하지 않는 사건에서도 무언가를 배운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이상한 일이 벌어지면 신경을 곤두세운다. (중략) 피드백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려면 가상의 고통을 느끼는 능력이 필요하다.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시연해 보고 잘못될 수도 있는 모든 가능성을 경계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특별한 종류의 감수성이 필요하다. 실패로부터 가르침을 얻고, 틀렸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을 통해 학습하는 능력이다. (68-69쪽)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길을 찾다 보면 예상치 못한 뭔가를 갑자기 발견할 때가 있어. 그럴 때면 ‘와, 이거 멋진데.’라는 생각이 절로 들지. 작업은 항상 하는 거야. 깨달음의 순간이라든가 전구에 불이 들어오는 순간 같은 건 아무 의미 없어. 실험은 항상 진행 중이니까. 일부러 시간을 내서 자꾸 이것저것 시도해 보고 주변을 열린 마음으로 바라봐야 해.” (92쪽)

슈퍼 인카운터러들은 누군가의 보상 없이도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를 즐기고 그러면서 몇 시간을 보내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러한 탐색 행위 자체가 내적 만족감을 안겨 주기 떄문이다. 뭔가를 발견한다면 행복하겠지만 그들은 이리저리 방랑하는 것 자체에서도 만족감을 느낀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목표 추구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그들의 성향이 그들을 결국 성공으로 이끄는 건지도 모른다.” (99쪽)

“대부분의 발명은 발명가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제품을 사용하는 방식을 관찰하는 데서 이루어지죠.” (163쪽)

급진적이고 야심찬 기술의 기원은 거의 언제나 이중 나선 구조를 보인다. 일단은 전선과 도면으로 시작되지만 우리의 기대치를 바꾸어 놓는 비전가의 저력이 개입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다. (169쪽)

“나는 자유롭게 추론하며 글을 썼고, 당시 아직 맹아기에 있었거나 구현이 불가능했던 여러 가지 기술적 요소와 장치를 실제 존재하는 양 묘사했다. 그런 기기의 제작을 제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독자들이 먼 미래를 내다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177쪽)

웨인 그레츠키 게임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수십 년 뒤의 세상을 상상해 본다. 그런 다음 기계의 진화와 인간의 필요와 욕망에 대한 예측을 바탕으로, 어떤 종류의 기술이 존재할 수밖에 없을지 생각해 낸다. 그에 대한 스케치를 그리고, 영상을 만들고, 이야기를 지어 그 기술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앨런 케이는 웨인 그레츠키 게임의 특벼한 지지자가 되었다. 비결은 “현재와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것들에 대해 꿈꾸는 것”이라고 그는 2014년 한 강연에서 이야기했다. “꿈은 비전으로 확장될 수 있고, 그 비전은 우리 주위에서 접할 수 있는 아이디어와는 전혀 다른 아이디어로 타오를 수 있습니다.” 그는 일반적인 문제 해결, 즉 주어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방식은 그 자체로 문제가 있는 방식이라 주장했다. “명백한 ‘문제’로 인식되는 것은 기실 현재 통용되는 세계관의 발현”일 뿐으로, 미래로의 도약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웨인 그레츠키 게임을 적용하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떠올리는 대신 “있으면 멋지거나 꼭 있어야 할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게 된다. (185-186쪽)

우리의 머릿속 실험실은 대단히 서사적인 특성이 있다. 미래의 기계를 발명할 경우, 그걸 사용할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 그들은 어디에 사는가? 무엇을 걱정하는가? 무엇을 갈망하는가? (217쪽)

라카니는 문제를 풀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실제 문제 해결이 지연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에스토니아의 어떤 아이가 낸 아이디어는 아무리 훌륭할지언정 십중팔구 주목을 받지 못할 겁니다. 외부인에게서 나온 아이디어는 강한 편견에 부딪힌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요.” (254쪽)

오늘날 우리는 발명이 ‘정치와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기업과 정부가 수익 창출 수단으로 발명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발명은 정부와 기업을 전복시킬 수도 있다. 발명은 본질적으로 위험하고 통제하기 어렵다. (301쪽)

애플과 구글은 많은 이들이 애용하는 굉장한 제품을 만든다. 하지만 기업은 사회 문제와 환경 문제를 해결하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더 강력한 종으로서 생존하고 적응해 나가기 위해 자연계를 닮은 또 다른 발명 시스템을 키워 나갈 필요가 있다. 우리 몸을 보호하는 면역 체계처럼 개방적이고 소란스러우며 탄력성 높은 연구개발 시스템이 필요하다. 공격이 가해질 때마다 더 강해지는 시스템이어야 한다. 그리고 통증 수용체와 단절되지 않고 오히려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선도 사용자, 내부 고발자, 환자, 사회적 약자, 빈곤층 등 기술의 실패로 고통을 겪는 이들이야말로 문제를 가장 잘 진단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바로 연구개발의 핵심이고, 핵심에 있어야만 한다. (342-343쪽)

3월 둘째주에 읽은 책

벌써 까마득하게 지나버린 지난 주이지만, 짤막하게나마 적어본다.

이곳 뿐만 아니라 모든 기록에 소홀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기억할 만한 일들이 없는 것은 아닌데. 기록할 여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무감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벌써 지난 주의 일은 일 년 전의 일인 양 까마득하기만 하다. 변명을 하자면, 둘째주에는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게다가 올해 들어 처음으로 책을 한 권도 사지 않은 주였다. 서점에는 들렀던가. 여의도 ifc몰에 있는 영풍문고에 잠시 들렀으나 책을 사지는 않고 나왔다. 이 주에는 다 읽은 책은 없고, 한 권만 쪼개어 읽었다. 지난 달 말 경에 센트럴시티 반디앤루니스에서 우연히 발견해서 손에 넣은 페이건 케네디의 <인벤톨로지: 불평가/문외한/몽상가/낙오자/불법거주자/눈엣가시들의 역사 – 새로운 것을 도래케 하는 생각의 힘>. 이번 주 들어 다 읽었다. 감상은 바로 이어서 쓸 다음 포스팅으로 넘기겠다.

서점에 가지는 않았으나 선물처럼 받은 책은 네 권 있다. 송인서적 부도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작은 출판사들을 돕기 위해 마련된 네이버의 공감펀딩에 참여하여 받은 선물이다. 엄밀히 말하면 리워드를 고르고 그에 해당하는 값을 치렀으니 선물이 아니지만, 뭐 어떠리. 기분이 중요하지. 나는 요새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유유 출판사’의 책 꾸러미를 골랐고, 아래의 네 권을 선물로 받았다.

  1. 이원석, <서평 쓰는 법: 독서의 완성>
  2. 은유, <쓰기의 말들: 안 쓰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는 기적을 위하여>
  3. 김정선, <소설의 첫 문장: 다시 사는 삶을 위하여>
  4. 니시야마 마사코, 김연한 역, <일본 1인 출판사가 일하는 방식>

아직 읽은 책은 없고, <쓰기의 말들>만 펼쳐 서문을 읽었는데 느낌이 예사롭지 않다. 네 권 다 흥미로워보이는 책이라 하나하나 읽어갈 예정. 우선은 <서평 쓰는 법>을 며칠 내내 가방 안에 넣어 다녔는데 아직 읽지는 않았다.

 

3월 첫째주에 읽은 책

 

2월의 마지막 주이자 3월의 첫 주는, 마치 한 달 처럼 느껴질 만큼 길고 긴 한 주였다. 눈코뜰새 없이 바쁜 한 주를 보내고, 주말에는 꽉 채워서 도쿄에 다녀왔다. 그러고보니 도쿄에서의 1년이 벌써 8년 전이다. 돌아온 뒤에도 두어 차례 도쿄에 갈 일이 있었지만, 이번 여행은 괜히 더 특별한 느낌. 돈은 없고 시간만 많았던 시절에 간 여행과, 돈은 있지만 시간이 없어서 겨우 쥐어 짜내서 간 여행의 차이인 건지,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이 달라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함께인 시간은 함께여서, 혼자인 시간은 혼자여서 좋았던 이번 여행. 1박 2일의 짧은 여정이라 많은 곳을 다니지는 못했지만, <지적자본론>을 읽은 이후로 줄곧 가보고 싶었던 다이칸야마 츠타야에 가서 읽고 싶은 책들을 잔뜩 사서 돌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다음에는 좀 더 느긋하게 혼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지만, 그런 아쉬움이 있어야 또 갈 수 있는 거니까. 아기와 함께 도쿄 시내를 돌아다니며 육아의 고단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불가능한 행복을 절실히 느끼고 돌아왔다. 언젠가 내 아이가 생기기 전에 열심히 혼자서 돌아다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짧은 비행이었지만 그동안 별러둔 책 한 권도 뚝딱 다 읽었다. 여러 모로 알차고 즐거웠던 한 주. 이제 돌아온지 겨우 4일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것은 벌써 그리워졌기 때문일까?

 

다 읽은 책

  1. 아즈마 히로키, <약한 연결>
  2. 김남주, <사라지는 번역자들>
  3.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끊어 읽은 책

  1. 록산 게이, <나쁜 페미니스트>

 

산 책

  1. 稲泉 連、『「本をつくる」という仕事』(이나이즈미 렌, <‘책을 만든다’는 일>)
  2. 村上春樹、『国境の南、太陽の西』(무라카미 하루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3. 夏目漱石、『こころ』(나츠메 소세키, <마음>)
  4. 筧 裕介、『ソーシャルデザイン実践ガイド――地域の課題を解決する7つのステップ』(카케이 유스케, <소셜 디자인 실천 가이드: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곱 단계>)
  5. 増田 宗昭、『代官山 オトナTSUTAYA計画』(마스다 무네아키, <다이칸야마 “오토나(어른)” 츠타야 계획>)
  6. 増田 宗昭、『情報楽園会社 TSUTAYAの創業とディレクTVの失敗から学んだこと』(마스다 무네아키, <정보낙원회사 TSUTAYA의 창업과 다이렉TV의 실패에서 배운 것>)
  7. 伊丹 十三、『ヨーロッパ退屈日記』(이타미 주조, <권태로운 유럽 일기>)

*1~6 다이칸야마 츠타야, 7 유락초 무인양품 MUJI Boo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