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독서

2018. 10. 28.

일요일

 

내 생에 이렇게 본격적으로 알차게 놀아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꽉꽉 채워 보낸 10월도 어느새 끝을 향해 달려간다. 책도 많이 읽고(사고), 영화도 많이 보고, 전시도 보고, 공연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으며 하여간 이곳저곳을 많이 쏘다녔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니 뭘 해도 좋았다. 몸도 마음도 함께 살찌우는 충만한 가을이었다. 돌아보니 정말 좋은 일들이 많았다. 몇 년 뒤에도 이 10월을 참 아름답게 기억하게 될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기왕에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놀아보자는 마음이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순간에 좋은 기회가 있어 11월부터는 다시 새로운 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전에 하던 일과 연속선상에 있으면서도 또 제반 조건들은 완전히 달라서 나로서도 큰 도전이 될 것 같다. 그래도 두려움보다는 기대감이 크다. 이전 프로젝트를 하면서 아쉬웠던 점들을 극복해나가며 일하고 싶다. 이전 직장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을 잘 가꾸어 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시간이 많아서 이런 저런 것들을 많이 읽기도 읽고 사기도 샀는데, 문제는 그때그때 기록을 안 해두었더니 기억이 벌써 까마득하다는 것. 다행히 무엇을 샀는지는 그때그때 적어두었는데, 야금야금 읽은 책들은 어느새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것들도 많다. 여전히 여러 가지를 조금씩 읽어가며, 언젠가 읽고 싶은 책들을 착실히 사모으고 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정말 행복했던 한 달.

 

다 읽은 책 

  1. 배리 슈워츠, <우리는 왜 일하는가>
    • 우리 사회는 일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리고 일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자신의 일(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은 온전히 개인에게만 달려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사회가 일을 대하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 ‘일’을 바라보는 익숙하지만 새로운 관점이 돋보이는 책.
  2. 오스틴 라이트, <토니와 수잔>
    • 책 속의 책에서 그리는 끔찍한 이야기보다, 책 속의 책을 읽는 독서의 경험에 더 간담이 서늘해진다. 만만치 않은 두께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읽어내려가게 만드는 잘 짜여진 이야기. 오랜만에 책 속에 아주 푹 잠겨 읽었다.
  3. 히라노 게이치로, <마티네의 끝에서>
    • 전자책으로 더듬더듬 읽어나간 책. 안타까움을 넘어 화가 나서 읽는 도중에 책을 내팽겨친 건 또 처음이다. ‘고구마 백 개 먹은 듯한 기분’을 아주 제대로 선사해 주었다. 그러나 결국 뒷 이야기가 궁금해서 며칠 뒤 다시 손에 들었다. 서사보다는 묘사에 주목해서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책. 선율을 묘사하는 작가의 문장력이 압권이다. 더불어 그의 박식함에도 혀를 내두르게 된다. 물론, 중간에 답답한 구석이야 있었지만 이야기로서도 결코 낙제점은 아니다. 다만 이 이야기를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내가 아직 미성숙한 것일뿐.
  4. 이기호,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읽고 있는 책

  1. 마사 누스바움, <시적 정의>
  2. 토니 셰이, <딜리버링 해피니스>
  3. 요시이 시노부, <잘 지내나요? 도쿄 책방>
  4. 다와다 요코, <여행하는 말들>
  5. 일라나 쿠르샨, <사랑은 끝났고 여자는 탈무드를 들었다>
  6. 테리 이글턴, <인생의 의미>
  7.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8. 최형욱, <버닝맨, 혁신을 실험하다>
  9. 문희언, <앞으로의 1인 출판사>
  10. 타라 브랙, <받아들임>

 

산 책 

  1.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읽거나 말거나>
  2. 요시이 시노부, <잘 지내나요? 도쿄 책방>
  3. 오스틴 라이트, <토니와 수잔>
  4. 홍성란, <채식은 어렵지만, 채소 습관>
  5. 장강명, <팔과 다리의 가격>
  6. 최형욱, <버닝맨, 혁신을 실험하다>
  7. 크리스티나 비외르크, <신기한 식물일기>
  8. 장강명, <노라>
  9. 일라나 쿠르샨, <사랑은 끝났고 여자는 탈무드를 들었다>
  10. 루스 크라우스/모리스 샌닥, <구멍은 파는 것>
  11. 앨런 존슨, <사회학 공부의 기초>
  12. 다와다 요코, <여행하는 말들>
  13. 말랄라 유사프자이/크리스티나 램, <나는 말랄라>
  14. 크리스티나 비외르크, <모네의 정원에서>
  15. 나카에 요시오/우에노 노리코, <그건 내 조끼야>
  16. 김소연, <i에게>
  17. 유진목, <식물원>
  18. 사이토 마리코, <단 하나의 눈송이>
  19. 레일라 슬리마니, <그녀, 아델>
  20. 조경란, <소설가의 사물>
  21. 브로드컬리 매거진, <서울의 3년 이하 서점들: 솔직히 책이 정말 팔릴 거라 생각했나?>
  22. 임소라, <도서관람>
  23. 문희언, <앞으로의 1인 출판사>
  24. 홍주의, <책 속의 유럽 아트북 페어>
  25. 체조 스튜디오, <사물함 2호>

*1-2: 땡스북스(9/27), 3-6: 교보문고 합정점(9/27), 7: 반디앤루니스 온라인(9/30), 8: 카카오메이커스(10/2), 9: 교보문고 광화문점(10/4), 10-12: 땅콩문고(10/5), 13-15: YES24 @f1963(10/9), 16-17: 손목서가(10/10), 18-20: 교보문고 광화문점(10/15), 21-25: 언리미티드 에디션(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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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번째: 여행에서 돌아오다

2018. 5. 30.

수요일

 

열흘 간의 미 서부 여행을 마치고, 어제 새벽 한국에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후다닥 짐을 풀고, 빨래를 돌리고, 샤워를 하고, 컵라면과 김치로 그리운 매운 맛을 느끼고는 실컷 잤다. 스무 시간은 족히 잔 것 같다. 달디단 잠이었다.

어릴 때는 여행을 떠나면 뭔가 대단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단지 타국 땅을 밟고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가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나라는 사람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지구 반대편에 산다고 해서 우리와는 아주 다른 삶을 살아가는게 아니라, 저마다의 일상을 영위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나에게 여행은, 저마다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 되었다.

어느새 결혼을 하고 세 번째 여행이다. 남편과 함께 떠나는 여행은, 혼자 떠나는 여행과는 무척이나 다르다. 친구와 떠나는 여행과도 다르다. 지구상 어디에 있어도 이 사람과 함께 하는 동안은, 우리가 있는 여기가 우리의 집이자 생활의 터전 같은 느낌이랄까. 태평양을 건너왔어도 남편은 한결같다. 잘 먹고, 잘 잔다. 자기 물건을 살 때에는 가성비를 엄청나게 따지면서, 내가 무언가를 산다 할 때에는 또 의심스러울만치 너그럽다. 인터넷이 터지는 곳에서는 유튜브를 찾아보고, 야구 경기의 결과를 확인하고, 늘 가는 네이버 카페의 유머방을 들락거리며 피식피식 웃는다. 그런 한결같음에 내가 지금 서울에 있는 건지, 라스베가스에 있는 건지 헷갈릴 때도 있었지만, 여행이라고 해서 마냥 붕 떠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발을 땅에 단단히 딛고 있는 듯한 안정감이 들어 좋았다.

무엇보다 편안했다. 스스로를 가장하거나 꾸밀 필요가 조금도 없는, 나의 방어막을 완전히 해제하게 만드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서울에서는 한 집에 살면서도 일주일에 밥 한 끼 같이 먹기 힘든 우리지만 여행에서는 24시간 내내 붙어 있었는데도 불편함이 없었다. 특별히 더 로맨틱하거나, 특별히 더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눈 것은 아니지만, 더없이 우리다운 시간을 보냈다. 언제 이렇게나 자연스러워진 것일까. 함께 보낸 10년의 세월의 힘이란 이런 걸까.

한때는 이 사람이 나를 평범하게 만든다는 생각도 했었다. 이 사람만 아니라면,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보고 접하고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그런 마음이 들어 실제로 이 사람을 떠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의 곁을 떠난 후에도 나는 여전히 내가 아는 세계 안에 머물렀다. 그에 대한 후회나 아쉬움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정말 나가고 싶었다면,  그와 관계 없이 나의 의지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탓을 하는 것은 가장 손쉬운 자기 합리화니까. 이제 조금 더 나이를 먹고, 조금 더 현명해진 나는,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다른 누구의 책임이나 덕분도 아닌 온전히 나의 선택 때문임을 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 퍽이나 만족스럽다.

어제 돌아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벌써 지난 열흘이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고, 출근을 앞두고 있다. 남편과 함께 미국에 다녀왔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은 채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 그럴 거면 굳이 왜 돈과 시간을 들여 그 멀리까지 다녀왔을까 하는 의심을 맘 한켠에 품고.

그래도 우리는 아마 다시 떠날 것이다.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 여기가 내가 있을 자리임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디에 있든, 삶은 변함없이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