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먼드 영, 소의 비밀스러운 삶

2018. 11. 24.

토요일

 

이 책과의 인연은 제법 특별하다. 올해 여름 처음 출간되었을 무렵, 인터넷 서점의 신간 소개 코너에서 보고 장바구니에 담아두었으나 잦은 서점 나들이에도 좀처럼 만나지 못해 한참을 잊고 있다가, 지난 10월 파주의 땅콩문고를 방문했을 때 처음으로 실물을 만났다. 서문을 살짝 읽어보니 역시나 마음에 들어서 사려고 집어 들었는데, 견본 책이 딱 한 권만 남은 상태라 아쉽게도 구입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물론 그 날도 다른 책들을 서너 권 더 사긴 했지만.) 그리고 나서 또 한참을 잊고 있었는데, 일 핑계로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땅콩문고 사장님이 올려놓은 추천 글을 보았다.

나란히 읽기 좋은 땅콩책

한 대상을 꾸준히 사랑하는 것? 할 수 있다. 그를 꾸준히 관찰하는 것? 음. 그럭저럭 할 수 있을 듯. 그것을 꾸준히 기록하는 것? 어렵다, 아무나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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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랑하고 관찰하고 기록하는 대상이 있어도, 결국 ‘꾸준히’에서 무릎을 꺾고 마는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책 두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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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살에서 다섯 살까지>는 아이의 ‘말’을 사랑한 러시아의 아동문학가이자 교육자 코르네이 추콥스키가 ‘아이들의 언어 세계와 동화, 동시에 대해’ 쓴 책이다. 특히 ‘두 살에서 다섯 살까지’의 아이를 키우는 부모와 교사, 어린이책을 쓰고 만드는 이들이 반드시 읽어봐야 할 필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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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 비밀스러운 삶>은 소를 비롯하여 양, 돼지, 닭 등 농장의 가축을 사랑한 영국의 ‘솔개 둥지 농장’ 운영자 로저먼드 영이 쓴 책이다. 스스로를 ‘소들의 대필작가’라고 부르는 저자가 제목 그대로 ‘소들의 비밀스러운 삶’을 기록한 관찰기로, 동물과 사람의 공생, 가축과 먹거리, 자연에서 우리가 미처 읽어내지 못한 이야기들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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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가 이 두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데에는 ’홍한별’이라는 번역자의 노고가 있다. 책을 읽고 저자 이름도 기억이 날까 말까 하는 내 머릿속에 ‘홍한별’이라는 이름이 박힌 데에는 <두 살에서 다섯 살까지>라는 책이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 책에는 언어 세계를 익히고 만들어나가는 아이들의 입말이 가득 담겨 있는데, 번역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번역서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원서의 표현을 앞에 두고 번역자가 단어 하나하나를 고심했을 것을 생각하면 아득해질 정도다. 책과 언어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해내지 못했을 일이다. <소의 비밀스러운 삶>은 짧은 내용에 비해 등장인물(농장의 소와 양 등등)이 어찌나 많이 나오는지 ‘소 가계도’를 그려 가며 읽어야 할 정도인데, 그렇게 복잡한 글이 단순 명쾌하게 읽히는 데에는 역시 번역자의 공이 크다. 앞서 소개한 두 권의 책 <두 살에서 다섯 살까지>와 <소의 비밀스러운 삶>을 재미있게 읽었다면, 더불어 책과 언어를 사랑하는 이라면, <출판하는 마음>에 실린 ‘번역자 홍한별’ 인터뷰를 꼭 챙겨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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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맛깔나게 쓴 추천사를 읽고 나니 당장 읽고 싶어져서 몸이 근질근질했는데, 그날 저녁을 먹고 야근 하러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들른 지근거리의 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는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구입해서 서문을 읽어치웠다. (여담이지만 땅사장님이 위 글에서 함께 추천해주신 <두 살부터 다섯 살까지>는 그 다음날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바로 받았다) 몇 페이지 안 되는 서문에서도 분명하게 전달된 농장 동물들을 대하는 저자의 진한 애정은, 평소 동물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는 나에게도 깊은 감동을 주었다.

매일을 농장에서 소, 양, 돼지, 닭과 같은 동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저자는, 가축을 단지 수익을 내기 위한 수단이 아닌 개별적인 개성을 가진 특별한 존재로 대하며 그들의 일상을 진지하게 관찰한다. 꾸밈 없이 투박한 문장으로 쓰여진 이야기를 읽다 보면, 한결 같은 애정으로 그들을 대해온 저자의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그리고 한 편으로, 나는 누군가를 이마만한 애정과 관심으로 지켜본 적이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땅콩문고 사장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누군가를 꾸준히 사랑하는 것은 할 수 있어도(물론 그조차도 쉽지 않지만), 그 사랑하는 대상을 꾸준히 관찰하고 또 기록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니까.

로저먼드 영의 이야기는  ‘인간’이 ‘동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생명이 있는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훨씬 더 보편적이고 넓은 범위에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교훈을 조만간 내가 새로운 공간에서 만나게 될 크고 작은 사람들을 대할 때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읽었다.

차영아 작가의 <오, 미지의 택배>나 최근에 읽은 이기호의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처럼, 다 읽고 나면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지는 “착한” 책이다. 게다가 재미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다면 좋겠다. 왠지 마음을 곱게 써야 할 것 같은 연말도 다가오니 말이다.

우리는 다른 종의 지능을 대개 사람 기준으로 판단하려 든다. 과연 인간의 기준이 다른 종에게 의미가 있을까? 동물에게는 다양한 생각과 감정을 느낄 무한한 능력이 있고, 이런 감정은 동물 나름의 관점에서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젖소의 지능이 젖소로서 잘 사는 데에 충분하다면, 그 이상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14쪽)

 

어린아이를 뒷바라지할 때 보살펴야 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처럼 송아지를 키울 때도 마찬가지다. 어린아이에게는 따뜻하고 안락하며 안정적인 환경이 중요하다. 좋은 옷과 신발, 먹을 것과 마실 것, 재미있는 놀잇거리, 또래 친구,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끌어 주고 사랑해 줄 어른이 필요하다. 방치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외로움과 두려움 속에서 지내는 아이가 균형 잡힌 어른으로 자라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농장 가축에게도 마찬가지 논리를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먹이의 질과 전체 환경이 앞으로 그 동물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를 결정한다. (31쪽)

 

+) 참고로 이 책과의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준 땅콩문고는 이번 달 말로 영업을 종료한다고 한다. 딱 한 번 가보았을 뿐이지만, 동네에서 사랑을 듬뿍 받는 서점이라는 게 느껴져서 늘 응원하고 있었는데 무척 안타깝다. 땅콩 사장님의 책 추천을 더 받지 못하는 것도 아쉽고. 꽤나 이름을 날리던 작은 서점들이 하나 둘 문을 닫고 있다. 게으름에 자주 다니지 못하고 맨날 큰 서점에서나 책을 사는 내가 과연 안타까워할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책을 너무 사랑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책들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든 분들이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는 토양이 한시 빨리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나부터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지만 말고, 뭐라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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