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의 마지막 날

2017. 12. 31.

일요일

 

2017년의 마지막 날. 새해가 밝기까지 불과 두시간 반 남았다. 작년 이맘 때 어디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분명히 기억이 나지는 않으나 아마도 집 – 이제는 친정집이 된 – 의 내 방에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올해도 역시 집에 있다. 그러나 작년의 그 집과는 다른 집의 안방 침대 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다. 옆에서는 남편이 쿨쿨 자고 있다. 그는 계절감에 크게 휘둘리지 않는 성격으로, 연말이라고 해서 특별히 뭔가를 해야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예전에는 그런 그가 무미건조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익숙하다. 그리고 그건 그거대로 의연해서 좋다고 생각한다. 진심으로.

올해의 마지막 날, 아침에는 느지막이 일어나 한참을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2시가 다 되어 겨우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둘이서 집을 나섰다. 밖에 나가서 밥도 먹고, 드라이브도 좀 하자고. 목적지는 하남. 그 유명하다는 스타필드를 가볼 요량으로, 근처의 돼지고기 맛집을 검색해서 찾아 갔다. 오랜만의 외식은 만족스러웠으나, 조용한 가게 안에서 두 건의 가족 불화의 현장을 목격하는 바람에 기분이 썩 편치는 않았다. 그길로 나와서 스타필드로 향했다. 이번에는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스타필드에 도착하니 주차장에 들어가기까지 차들이 한참 밀려 있었다. 요 며칠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남편이 좀 힘들어하는 것이 눈에 보여, 구태여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을 헤집고 다닐 이유는 없을 것 같아 미련없이 핸들을 돌렸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는 난생 처음으로 보복운전이라는 걸 당해봤다. 역시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었으나 그리 불쾌할 것도 없었다. 그저 얼떨떨할 뿐이었다. 그러나 살짝 얼이 빠져서, 무척 긴장한 상태로 운전을 했다.

집 근처의 대형 마트에 잠시 내려 떡국 재료를 샀다. 연말에도 분위기를 제대로 내지 못했기에, 새해 떡국만큼은 제대로 만들어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사람이 많았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고 하면 뭔가 특별한 걸 해야할 것 같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은 평소와 다름 없는 일상을 보낸다. 쇼핑몰에 가고, 마트에서 장을 보고, 외식을 하는 것처럼. 나 역시 그렇게 보냈다.

집에 와서는 냉장고 한 켠을 차지하고 있던 – 그러나 영영 먹을 일은 없을 것만 같은 – 해묵은 식재료들을 처분하고 빨래를 돌렸다. 식탁에 앉아 잠시 번역을 했다. 얼마 하지도 않았는데 금새 집중력이 똑 떨어져서, 아까 마트에서 사온 과자를 집어 먹으며 핸드폰을 하고 놀았다. 그리고는 한 편 남은 <녹턴>을 올해가 가기 전에 다 읽으려고 집어들었다. 그리고 다 읽었다.

예전에는 새해가 되면 마치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설레고 신이 났다. 몇 주 전부터 다이어리를 준비해서, 새해 계획들을 빼곡히 적어나갔다. 그러고 있는 동안에는 마치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단지 해가 바뀐다고 해서 갑자기 딴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정도로는 커버렸나 보다. 오히려 담담하다. 조금은 서글프기도 하다. 올해는 유난히 더 그렇다. 돌아보는 마음이 스산하다.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하나 하나 닫으면서 여기까지 왔다. 모든 선택을 긍정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럴 수만은 없다. 역시 한 것 보다는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더 크다. 그러나 여전히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안도감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지금 당장은 내가 한 선택이 나아보인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5년 뒤, 10년 뒤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을. 그러나 5년 뒤, 10년 뒤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나는 늘 지금을 살리는 선택을 했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든다. 내 안의 어떤 부분이 폭삭 늙어버린 기분이다.

다만 시간을 믿는다. 지나온 시간을. 그리고 앞으로 지나갈 시간을. 20대의 내가 한 모든 선택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것들이 오롯이 내 몫으로, 나의 책임으로 남았음을 받아들인다. 내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조금씩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해갈 수는 있다고 믿는다. 대책없이 긍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덮어놓고 비난하고 싶지도 않다. 스스로에게 엄격해야 할 부분과 너그러워야 할 부분을 분별해내고 싶다. 그리고 이제는 ‘전문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방향을 정하고, 길러가고 싶다.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이룬 것이 없어 보일 수 있지만, 차곡차곡 쌓아온 한 해였다.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지만, 가장 소중한 것을 얻었다. 새로운 가정을 꾸렸고, 새로운 공간을 열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소중한 것들이 늘어났다. 운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내 곁에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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