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넷째주에 읽은 책

거의 완벽에 가까운 주말을 보냈다. 보고 싶던 영화를 두 편이나 보았고, 읽고 싶던 책도 실컷 읽었다. 양껏 늦잠도 자고, 스릴 넘치는 드라이브를 하고, 사고 싶던 책도 한아름 사고, 늦겨울의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밤 산책도 했다. 한껏 부풀어오른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지난 한 주를 정리하며 이 글을 적는다. 스스로가 어떨 때 행복을 느끼는지를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자주 스스로를 행운아라고 느낀다. 기분이 가라앉는 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자주 슬퍼하고, 자주 열패감을 느끼지만, 그런 감정에 젖을 때마다 스스로를 달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슬플 때는 마음껏 슬퍼하고, 기쁠 때는 마음껏 기뻐하자. 오늘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상투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진부함은 어느 정도 진실을 담보한다. 닳고 헤질 때까지 회자된 이야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나는 종종 ‘아이쿠,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하는 생각을 한다. 무언가 대단한 일이 있어서는 아니다. 이를테면 오늘 나는 천천히 길을 걷다가, 200m 정도 앞 골목에서 갑자기 오토바이가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그 생각을 했다. 긴장할 만큼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다. 아마 그 오토바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을 확률은 희박할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내가 조금만 더 빨리 걸었더라면, 그 오토바이가 조금만 늦게 출발했더라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지나친 상상력일지도 모르겠으나 이런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이 한 줌의 생명과 그로 인해 가능한 이 생활에 진심으로 감사하게 된다. 오늘 죽음을 가까이 느꼈을 때 다행히 나는 무척 만족스러운 상태였고, 아쉬움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만약 죽음 뒤에도 의식이 존재한다면 이런 상태에서 죽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월의 네 번째 주도 좋은 한 주였다.

다 읽은 책

  1. 테리 이글턴,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 1월 언젠가에 산 책을 2월의 끝자락에 다 읽었다. 한 권의 책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일이 가능할까? 물론 나는 가능하다고 믿는다. 나는 테리 이글턴의 친근하면서도 날카로운 글을 통해, 그동안 내가 맹목적으로 사랑해온 문학을 좀 더 ‘정확하게’ (분명히 밝혀두건데 여기서의 ‘정확하다’는 형용사는 신형철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쓴 모든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 노신사(?)와도 사랑에 빠진 것 같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사람의 ‘글’과 사랑에 빠졌다고 해야겠지만.
    • 영화 <컨택트>를 본 이후로 나는 언어와 사고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생각은 선형적으로 전개되기보다는 산발적으로 떠올랐다 흩어지는 것이라 아직 어떤 형태를 갖추지는 못했으나 나의 무의식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읽기 시작한 이 책은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읽을 때 더욱 각별하게 다가왔다. 저자는 문학 읽기의 다양한 요소(도입부, 인물, 서사, 해석, 가치)에 대해 미시적 관점과 거시적 관점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독자를 안내하지만, 그 안에서 결코 놓치 않는 끈은 문학 안에서의 언어의 위상이다. 일상 언어가 도구라면, 문학 언어는 내용 그 자체이다. 단순히 내용을 담기 위한 그릇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이미 내용물인 것이다.
    • 근 400 페이지에 이르는 이 책에서 저자는 수많은 질문을 던지지만 결코 하나의 답을 강요하지는 않으며 다른 가능성을 향한 문을 열어둔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의 주장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지도 않는다. 놀라운 균형감각이다. 무엇보다 잔 가시가 많은 생선 뼈를 발라내듯 섬세하게 작품을 해석해내는 능력은 탁월하다. 비록 그가 인용한 대부분의 작품은 영미문학(간혹 스탕달이나 카프카 같은 대륙의 작가들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서구권에 한정되어 있다)에 집중되어 있긴 하지만, 문화권을 초월해 모든 종류의 문학 읽기에 적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물론 그 ‘보편성’을 어떻게 각각의 ‘특수한’ 작품과 무엇보다 언어에 적용시킬지는 온전히 작품을 읽어나갈 독자의 몫이겠지만 말이다.
    • 더불어 이 책으로 인해 – 그리고 내가 추천하자마자 이 책을 구입한 추진력 있는 친구 덕분에 – ‘책 읽는 수요일’이라는 출판사를 관심 있게 보게 되었다. 이번 주에 절반쯤 읽은 <일의 기본, 생활의 기본 100>, 그리고 이번 주에 구입한 테리 이글턴의 <인생의 의미> 역시 이 출판사의 책이다. 믿고 보는 출판사가 많아지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2.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아마도 편혜영이었던 것 같은데, 북바이북에서 있었던 <홀>의 작가 번개에서 좋아하는 소설에 대해 물었을 때 이야기한 것을 기억해 두었다가 얼마 전 북티크에 갔을 때 마침 있길래 구입했다. 물론 내용이 중요하지만, 기왕 읽을거면 – 게다가 책장에 꽂아둘 거라면 – 예쁜 책이 좋다. 중요한 학술 서적을 많이 펴내지만 디자인 감각은 여전히 90년대 초반에 머물러 있는 ‘까치’ 출판사의 책이라 장바구니에 담아두고도 계속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북티크에서 발견했을 때도 역시 사고 싶은 마음은 별로 들지 않았지만 이러다 영영 이 책은 안 읽겠구나 싶어 구입했다. 그러고도 한참 손이 가지 않아 꽂아 두었다가, 어제 집을 나서면서 집어 들고 나왔다. 그리고는 이 책을 구입한 바로 그곳에서 서너 시간 동안 바짝 집중해서 다 읽었다. 훌륭한 작품이어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고, 좋아하는 작품이어도 훌륭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책은 굳이 따지자면 전자에 해당한다. *테리 이글턴도 위에 소개한 책에서 비슷한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예술 작품을 즐기는 것과 경탄하는 것은 다릅니다. 경탄하지 않는 책을 즐길 수 있고, 즐기지 않는 책을 경탄할 수도 있습니다.” (<문학을 읽는다는 것>, 347쪽)
    • 본디 제법 시간차를 두고 따로 출간된 세 권을 번역하면서 한 권으로 묶어 펴낸 이 책은 우선 세 부(원래대로라면 세 권)의 문체가 도드라지게 다르다. 아마 이렇게 묶여 있지 않았더라면 연속된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정도로 다르다. 전쟁으로 인해 뒤틀려버린 쌍둥이 형제의 엇갈린 운명에 대한 이야기인 이 책은 여느 전쟁 이야기들처럼 충격적이고 다소 불쾌한 에피소드로 가득하다. 거의 천진하기까지한 담담한 문체는 충격을 배가시킨다. 그러나 너무 다른 시대를 살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너무나 소설적인 인물이어서일까, 주인공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물론 모든 소설의 주인공에 다 감정 이입을 하거나 그들을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이들의 이야기는 지나치게 비틀려 있어 오히려 평면적으로 다가온다. 주인공들보다는 주변 인물들이 오히려 주의를 잡아 끈다. 형식 면에서는 1부에서는 일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고, 그것의 진실성 여부가 후반부의 서사를 이끄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점에서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를 살짝 떠올렸다. 물론 그 점을 제외하고는 이 두 소설은 무척 다르다. 문학사적으로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더욱 높게 평가될지라도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나를 찾아줘> 쪽이 훨씬 더 매력적이다.
    • 두 번 읽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한 번 읽을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본디 세 권이었던 책을 한 권으로 묶어 펴낸 출판사의 결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유감스럽다. 물론 세 권이 한 권이 됨으로써 비용 면에서는 훨씬 부담이 줄게 되었을지 모르나, 세 권을 따로 읽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경험을 독자에게서 빼앗아 가버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독서 경험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지나친 개입이었다. 물론 두 경우를 비교해보았을 때 이쪽이 더 좋았을 수도 있으나 그것은 이제 나로서는 영영 알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이미 한 권으로 읽어버렸으니 말이다.

끊어 읽은 책

  1. 마쓰우라 야타로, <일의 기본, 생활의 기본 100>
    • 직장 내에서 벌어진 갈등으로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로 출근한 아침, 사무실에 갖다 둔 이 책을 꺼내어 단숨에 읽었다. 기본 중의 기본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의외로 잘 생각하지 못하는 내용들도 있어 귀퉁이를 접어가며 읽었다.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책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저 읽는데서 끝나서는 읽지 못한 것만 못한 책일 수도 있으나 잠언처럼 옆에 두고 한 번씩 들춰볼 만한 책이다. 몇 가지는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려 애쓰고 있다. 이를 테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열 명이라면, 싫어하는 사람도 열 명” 이나 “자기 전에 아침 얼굴 만들기” 같은 것.
  2. 김남주, <사라지는 번역자들>
    • 역시 첫인상은 좀처럼 틀리지 않는다. 잡지 <어라운드>의 인터뷰에서 처음 알게 된 그녀에 대한 인상 – 은근하고 진중하며 섬세한 – 은 그녀의 책을 읽고도 변하지 않았다. 그녀의 문장은 시인의 것과도 소설가의 것과도 다르지만 특유의 멋이 있다. 일부러 멋을 부리지는 않지만 단정하고 정갈하다. 한마디로 믿음직스러운 문체다. 앞으로 그녀가 번역한 책이라면 읽어볼 것도 없이 사버려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신뢰감을 주는 문체. 그것은 아마 번역이라는 자신의 업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 문학을 향한 순정한 마음이 문장 안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분야든 한 가지를 뚝심 있게 지속해온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감동적인 일은 없다. 그녀의 이야기에는 그런 잔잔한 힘이 있다.
  3. 서윤후,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 김소연 시인의 <수학자의 아침>이라는 시가 갑자기 읽고 싶어져서 구글에 검색해 들어간 곳이 서윤후 시인의 블로그였다. 처음에는 그가 시인인 줄도 몰랐는데, 블로그를 구경하다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여느 블로그와 마찬가지로 일상의 기록이 주를 이루는데, 그 기록을 이루는 문장들이 심상치 않다. 시인다운 문장이었고, 읽기만 해도 배부른 문장이었다. 그래서 그날 바로 서윤후의 시집을 찾아서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는데, 왜인지 사지는 않고 있다가 얼마 전 서점에서 손이 닿아 구입했다. (엄밀히 말하면 일부러 사기 위해 찾아보았으니 ‘손이 닿았다’는 표현은 틀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동안 책꽂이에 꽂혀 있다 얼마 전부터 자주 오고 있는, 시인과 이름이 같은 윤후라는 아이를 볼 때마다 이 책이 생각나서 출근 길에 들고 나와 읽었다.
    • 맘에 드는 시가 몇 편 있다. 농익지는 않았으나 간혹 소년다운 앳됨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싯구가 매력적이다. 조금 더 읽어봐야겠다.
  4. 마르쿠스 가브리엘,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1. 인터넷 서점에서 광고하는 것을 보고 흥미로울 것 같아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가, 지난 주에 서점에 갔을 때 조금 읽어보고는 바로 구입했다. 이제 1장을 다 읽고, 막 2장에 들어간 참이다.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라니, 애초부터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는 질문이다.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데, 왜 그럴까? 하고 묻는 것이니까 말이다. 저자의 주장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칸트가 이야기한 물자체(物自體)로서의 세계, 그러니까 세계 그 자체로서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고, 여러 가지 독립적인 영역의 세계들이 함께 공존하는, 일존의 영역들의 영역으로서의 세계만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렇게 적고 보니 무척 복잡하다. 나는 1장까지 읽고서 세계란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하나의 전체가 아니라, 각각의 영역이 각자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것이라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는데, 이 생각은 무척 매력적이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을 때면 그 다양한 스펙트럼에 이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가 왕왕 있다. 이를 테면 이번 주에 본 두 편의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와 <매기스 플랜>은 감정선과 깊이에 있어 양극단에 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 두 가지 이야기가 비슷한 시기에 동시에, 하나의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상상하면 굉장한 이물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각각의 서로 다른 세계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 이물감은 순식간에 해소된다. 여기 적은 것은 무척 초보적인 수준이라 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읽어가며 생각을 정리해야 겠지만, 어쨌든 철학책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흥미진진하고 매력적인 책임은 분명하다.

산 책

  1. 황인찬, <희지의 세계>
  2. 이성복, <불화하는 말들>
  3. 김소연, <눈물이라는 뼈>
  4.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5.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6. 테리 이글턴, <인생의 의미>

(모두 강남 교보문고)

 

그 밖의 읽기

“Anthony Bourdain’s Moveable Feast”, by. Patrick Radden Keefe, from The New Yorker Magazine.

Advertisements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