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둘째주에 읽은 책

열흘만의 포스팅. 2월의 두번째 주는 순식간에 흘러갔다. 책을 거의 읽지 못했지만, 못 읽은 만큼 많이 샀다.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일을 드디어 끝내고, 새로운 일을 하나 또 벌이기로 했고, 출퇴근을 시작한지 한 달 반만에 처음으로 조퇴를 하고, 비행기 티켓을 하나 끊었다. 영화를 한 편 보았고, 하루는 좋아하는 친구와 아침부터 밤까지 꼬박 14시간을 함께 보냈다. 일을 하는 이유와 궁극적으로 만들고 싶은 지점이 조금씩 뚜렷해지고 있다. 어렵지만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니 즐거움이 크다. 아이들은 거의 매일 같이 사랑한다는 말을 해준다. 살면서 이렇게나 많이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시기가 있었나. 연애할 때보다 더 많은 “사랑해”를 받고 있다. 이렇게 돌이켜보니 여러모로 행복하지 않을 수 없는 나날들.

다 읽은 책

오은, <유에서 유>

  • 이 주에 다 읽은 책은 시집 한 권이 다다. 출퇴근을 하며 야금 야금 읽었던 시집의 마지막 장을 덮은 것은 아마도 화요일이었는데, 그 뒤로 거의 책을 읽지 못했다. 수도 없이 밑줄을 그으며 읽었다. 시집을 읽으며 처음으로 소리내어 웃어보았다. 오은이 단어를 다루는 방식은 무척이나 능청스럽다. 젠체하지 않으며, 구태여 난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직접적이지는 않고, 흥겨운 말놀이 속에는 가끔 훅 찌르고 들어오는 구절이 있어 방심하던 차에 뜨끔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 한 권을 읽는 내내, 나는 그의 재기발랄한 단어 감각에 매료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시집을 덮고 나니 가장 뇌리에 깊숙이 박힌 것은 평범하디 평범한 단어들로 이루어진 다음의 연이었다.

개가 한 마리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보는 개

개도 나를 처음 봤을 것이다

– <계절감> 중에서

  • 제일 처음에 실려 있는 <계절감>이라는 이 시는 여름과 가을 사이, 계절이 바뀔 때의 서늘한 감각을 몇 가지 소재들로 이루어진 장면으로 구성해 보여준다. 그 중 ‘개’는 시적 화자인 ‘나’와 대비되며 묘한 긴장감을 조성하고 시에 균형을 잡아준다. 3연에서 서로 처음 만난 ‘개’와 ‘나’는 4연에서 서로를 스치고 훑으며 견제한다. 그리고는 잠시 떨어졌다, 6연과 7연에서 다시 대칭을 이룬다.

땀을 흘리는데도

개는 가죽을 벗지 않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

땀을 흘리는데도

나는 외투를 벗지 않고 있었다

어찌하지 않은 일

– <계절감> 중에서

  • 사실 이 시에서 ‘개’의 의미에 대해 찐하게 논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럴 능력도 안 되고. 다만 내가 이 구절이 계속해서 떠오른 것은 아주 간단하지만 쉽게 놓치는 어떤 발상의 전환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 아니, 나는 — 일단 개을 보았을 때 1) 저 개는 처음 본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으며, 따라서 2) 저 개도 나를 처음 보겠구나 하는 생각은 더더욱 하지 않는다. 이것은 나는 늘 스스로 ‘보는’ 주체인 동시에 누군가의 시선에서 – 설령 그것이 인간이 아닐지라도 – ‘보여지는’ 객체가 될 수 있다는, 주체와 객체에 대한 인식이 전복되는 순간을 우아하게 묘사한 구절이라 마음이 끌렸다.
  • 2주째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는 테리 이글턴의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의 도입부가 떠오른다. 문학을 다른 글과 차별화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 내용과 형식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라는 것. 학부 시절 미학을 공부하면서 시선의 문제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고찰한, 한 단락을 이해하기 위해 꼬박 세 시간을 이야기해야 하는 글들을 여러 편 읽었지만 한번도 그것을 나의 감각으로 받아들여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 짧은 시는 그 ‘내용’과 ‘형식’을 훌륭하게 결합하여, 아마도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뚜렷한 인상을 남겼다.
  • 그 외에도 이 시집에서 좋았던 구절은 수도 없이 많다. 하도 접어서 책의 두께가 두 배는 된 것 같다. 안타깝게도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 책이 곁에 없어 이 정도로 줄이고 넘어간다. 그러나 머지 않아, 그것도 꽤 자주 다시 찾게 될 것임을 확신한다. 오은의 나머지 두 시집은 이미 책장에 자리를 잡았다.

읽고 있는 책

읽고 있는 책 코너는 이번주에는 쉽니다. 조각조각 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잠들기 전의 찰나에 몇 페이지 읽고 만 정도라 맨 정신에 다시 읽어야 할 것 같아서 패스.

산 책

  1.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끝과 시작>
  2. 브레네 브라운,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
  3. 김남주, <나의 프랑스식 서재>
  4. 오은, <호텔 타셀의 돼지들>
  5. 장 폴 사르트르, <말>
  6. 신경숙,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7.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8. 제프 다이어,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
  • 1-4는 인터파크도서, 5-8 북티크 서교점에서 구입.
  • 1-4는 오은 시집을 다 읽은 날, 오은의 <호텔 타셀의 돼지들>을 사고 싶어서 가장 많이 이용하는 인터넷 교보문고에 들어갔다가 품절 표시가 뜬 것을 보고 조바심이 나서 다른 곳을 뒤져서 구입했다. 같은 경로로 들어오게 된 것이 브레네 브라운의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 교보문고 뉴스레터였나, 여성 지식인 어쩌구저쩌구 특집에서 소개된 저자들 중에 평소에 관심 있던 에이미 커디가 들어 있어 그 특집 중 다른 사람들이 쓴 책도 함께 찾아보았는데, 그 중 브레네 브라운이 있었다. 그녀의 책 중에 가장 궁금했던 것이 이 책이어서 장바구니에 넣어뒀는데 역시나 품절 표시가 떴길래, 괜히 마음이 급해져 그김에 주문. 쉼보르스카와 김남주는 사실 무슨 기준에서 선택된 것은 아니었다. 쉼보르스카는 김소연 시인의 <시옷의 세계>를 통해 처음 접한 후 먼저 유고시집 <충분하다>를 통해 만났다가, 얼마 전 읽은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에서 또 언급이 되어 뇌리에 박혀 있었다. 언젠가 사야지 하고 있던 것을 드디어 샀달까. <나의 프랑스식 서재>는 말할 것도 없이 얼마 전 구입해서 읽고 있는 <사라지는 번역가들> 때문에 구입했다. 김남주가 번역한 책들을 본격적으로 읽어보기 전에, 그녀가 쓴 옮긴이의 말들을 한 데 모아둔 이 책을 먼저 읽어보기로 했다.
  • 5-8은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공간인 북티크에 친구와 함께 갔다가 충동적으로 구입한 것들. 사르트르의 <말>은 김남주의 <사라지는 번역가들>에 소개된 것을 보며 읽고 싶어져서, 신경숙은 같이 간 친구가 그날 가져와서 읽은 책이었는데 너무 좋다며 꼭 읽어보라고 추천을 하기에,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편혜영인가 김금희인가, 작가 번개에서 저자가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로 꼽아서 전부터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다가 표지가 마음에 안들어 안 사고 있었는데 이렇게 미루다가는 평생 안 읽겠다 싶어 눈에 들어온 김에,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는 지난 번에 북티크에 왔을 때 발견하고 마음에 들어서 살까말까 고민했는데 이번에 갔을 때도 아직 있길래, 역시나 이번에 안 사면 이 책과 다시 스칠 일은 없겠다 싶어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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