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첫째주에 읽은 책

설을 보내고 나니 1월도 다 가버렸다. 시간이 가는게 무섭게 빠르게 느껴지다가도, 지난 한 달 동안 있던 일들을 돌이켜보니 겨우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한 달을 세 달처럼 살았다. 그게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대로 열심히 살았다는 뜻일 수도 있겠지. 사실 이런 시간감각이 그리 낯설지는 않다. 재작년 하반기에서 올해 초까지, 내 인생에서 제법 임팩트 있는 사건들이 촘촘한 간격을 두고 일어나, 되짚어볼 때마다 깜짝 놀라곤 했다. 삼 년은 지난 것 같은데, 겨우 세 달전 일이라니! 하면서.

지지난 주에 쓴 글을 보니, “아무리 바빠도 한 주에 책 한 권도 다 못 읽는 건 슬프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번 주에 와서는 그런 생각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책 한 권도 책 한 권 나름이다. 한 권을 다 끝내지 못하고 여러 권을 짧게 끊어서 읽었더라도 그것이 밀도 있는 독서였다면 한 권의 느슨한 독서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은 아닐까? 어디에 더 중점을 둘 것이냐도 결국은 스스로의 선택에 달린 문제인데, 나는 늘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하는 데 있어 양과 질 사이를 갈팡질팡 오간다. 두 가지를 다 달성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겠지만.

이번 주에는 여러 책들을 끊어 읽었고 한 권을 다 읽었다. 그리고 또 새로 네 권의 책을 들였다. 그리고 큰 맘을 먹고 책장을 대대적으로 정리했다. 다시 펼치지 않을 것 같은 책들은 과감하게 책장에서 빼내고, 새로 산 책들 위주로 책상에 가까이 꽂았다. 졸업한 이후로 한 번도 책장을 넘긴 적 없는 전공 서적들도 과감히 빼내어 먼 책장으로 옮겼다. 일부는 아예 처분을 할까 고민하고 있다. 언젠가는 읽겠지, 하는 마음으로 갖고 있던 책들도 이제는 보내줄 때가 된 것 같다. 훗날 퍼뜩 어떤 계기로 다시 들이는 날이 올지라도. (물론 그때 가서 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 오래도록 끌어 안고 있게 되는 원인 중 하나지만.) 이중으로 꽂혀 있던 책꽂이들이 한결 가벼워지자 마음도 덩달아 가뿐해졌다. 오래도록 다른 책들 사이에 가려져 있던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도 다시 책등을 드러냈다. 오래되어 책등이 바랬지만 여전히 처음 이 전집이 책장에 꽂혔을 때의 설렘이 생생하다. 그 사이 몇 권은 자취를 감추었다. 대개는 누군가에게 빌려준 뒤 빌려주었다는 사실도 잊은 채로 한참이 지났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빌려줄 때는 늘 준다는 마음으로 빌려주기 때문에, 그중 정말 간직하고 싶은 책은 돌아오지 않으면 미련 없이 다시 산다. 하지만 요즘 들어 독서 습관이 바뀌어서 밑줄도 긋고 귀퉁이도 접으며 읽는데, 그렇게 읽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책이 사라진다면 역시 조금 슬플 것 같다. 그런 책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사람에게만 빌려줘야겠다.

새삼스러운 결심을 뒤로 하고, 이번 주에 읽은 책들 이야기로 넘어가자.

 

다 읽은 책

장강명, <그믐: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내가 장강명을 처음 알게된 것은 소설 <한국이 싫어서> 였다. 집에 오는 길에 들른 서점에서 발견하고는 단숨에 읽어버렸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다 읽어버린 탓에 살까, 하고 잠시 고민하다 다시 내려두고는 딴 책을 사들고 집에 왔더랬다. 주인공에게 고스란히 감정 이입을 할 수 있을 만큼 섬세하게 묘사된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남자 작가가 쓴 책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주인공(여자)의 심리가 잘 표현되어 있어 놀라웠다. 신작이 줄줄이 쏟아져 나온 것은 알았지만 왜인지 별로 손이 가지 않아 한동안 있고 있었다가, 친구가 최근에 <한국이 싫어서> 를 읽었는데 참 좋더라, 하기에 다시 생각이 나서 지난 주에 서점에 갔을 때 <그믐>을 사 왔더랬다.
  • 장강명의 수 많은 소설 중에 왜 <그믐>을 골랐을까? 아마도 제목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믐>이라는 단어가 주는 아스라한 울림도 좋았지만, 그 뒤에 붙은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라는 부제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세 개의 단어로 구성된 각 장의 제목들도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다 읽고 난 뒤의 감상은, ‘나쁘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좋지도 않았다.’
  • 세 인물의 이야기가 어지럽게 얽힌다. 대부분이 대화로 구성되어 있으나 큰 따옴표는 없어 평서문과 구별되지 않는다.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서는 켄트 하루프의 <밤에 우리 영혼은>도 이 독특한 표기법을 따르고 있다.) SF 적인 신비로운 요소도 있으나 날카로운 현실 또한 공존한다. 과하다 싶을 정도의 많은 요소들을 부담스럽지 않게 버무려낸 것은 분명 작가의 능력이다. 그러나 왜인지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미 많은 다른 글을 읽고 난 뒤에 읽어서 받아들일 정서적인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저 나의 취향에는 맞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
  • 제 20회 문학동네 작가상 수상작인 이 책의 뒤에는 심사평과 수상 소감이 함께 적혀 있다. 심사평의 온도는 다양했는데, 한없이 찬탄에 가까운 뜨거운 열광의 다른 쪽 끝에는 다소 냉담한 평가도 있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위치한 심사평들 중에는 유독 ‘처음 읽었을 때는 갸우뚱했으나, 다시 읽어보니 과연 수상작 답더라’는 내용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그래서 나도 한 번 읽은 것으로 결론을 내기 보다는, 묵혀두었다 다시 읽어보려 한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 소설쓰기를 전장에 비유한 작가의 수상소감 역시 인상적이었다.

 

끊어 읽은 책

  1. 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 서교동 북티크에서 책을 사온 그날 밤에 펼쳐 읽은 뒤로 한참만에 다시 읽었다. 역시나 질투가 날 만큼 정교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한다. 두루뭉술하게 갖고 있던 이미지들을 날카로운 칼로 발라내어 정갈한 표현으로 들이미는 문장. 그 문장을 거치면서 막연한 이미지는 정확한 언어가 되어 새로운 감각을 깨운다. 좋은 글은 그렇게 없던 감각도 생기게 만든다. 그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존재하게 된다. 보이지 않았던 것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진다.
    • 신형철이 쓴 시인, 그리고 시 이야기를 읽고 있으니 읽고 싶은 시, 알고 싶은 시인이 자꾸만 늘어났다. 덕분에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는 또 포화상태. 김소연의 <시옷의 세계>로 처음 발을 들인 시의 세계를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가 손을 끌어 인도해주는 느낌이랄까. 난해함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으나 전보다는 훨씬 더 가까워진 것 같다.
  2. 오은, <유에서 유>
    • 오은의 시집 역시 같은 날 북티크에서 사왔다. 한 편씩 아껴 읽다 그만 찻물을 쏟아 못쓰게 된 시집을 얼마 전에 다시 샀다. 환승이 잦은 출근길에 산문을 읽으면 흐름이 자꾸 끊기다 보니 시나 읽어볼까, 하고 들고 나왔다. 이 시집의 앞날개에는 오은의 시를 ‘말놀이’에 빗댄 글이 실려 있다. 시를 읽어보면 과연 그렇구나, 싶다. 간결하고 명쾌한 방식으로, 말놀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아이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직접적이지만 결코 억지스럽지는 않다. 풉, 하고 웃음이 터져나오는 싯구가 있는가 하면 몇 번이고 곱씹게 되는 묵직한 울림도 만나게 된다. 맘에 드는 구절이 너무 많아서 접고 접고 또 접었다. 시를 읽어볼까, 생각하는 사람에게 추천하기에도 부담 없는 선택이 될 것 같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3부까지 읽었다.
  3. 김남주, <사라지는 번역자들>
    • 베테랑 프랑스문학 번역자인 김남주의 에세이집. 마음산책 블로그에서 출간 소식을 처음 접한 뒤부터 계속 읽고 싶었는데, 지난 주에 드디어 구입해서 이번 주에 조금 읽었다.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잡지 어라운드와의 인터뷰에서였는데, 짧은 인터뷰에서 전해져오는 깊이감이 좋았다. 당연히 편집을 거쳤겠지만 그녀가 구사하는 문장들도 좋았다. 번역은 늘 짝사랑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 에세이가 나에게는 특히 각별하다. 자기 전에 읽기 좋은 책이라 조금씩 아껴 읽고 있다.
    • 책을 읽다보니 장 그르니에와 사르트르와 로맹 가리를, 기왕이면 김남주의 번역으로 읽고 싶어졌다. 이렇게 또 장바구니에 담을 책은 늘어만 간다.
  4. 울리히 슈나벨,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의 힘>
    • 작년 말,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산 책이다. 작년 내내 뭘 하는 지도 모를 정도로 바쁘게 지내다 보니 제목에 끌렸던 것 같다. 그래놓고 한동안 잊고 있다, 내내 긴장상태로 지난 한 주를 보내고 나니 갑자기 이 책이 절실해졌다. 지난 주 금요일 퇴근하고 나니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손가락을 가눌 힘도 없었다. 이번 주에 이미 감기 때문에 운동을 하루 못 간 터라, 이날은 꼭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간단히 요기를 한 뒤 운동을 가려고 짐을 챙기면서 이 책을 함께 넣었다. 집 앞 패스트푸드 점에서 햄버거 세트를 먹으면서 (그렇다. 운동 가기 직전에 무려 햄버거를 먹었다. 채하지 않도록 꼭꼭 씹어 먹었다.) 이십 분 정도 읽었는데, 놀랍도록 충전이 되었다. 머리도 맑아졌을 뿐더러 없던 기운이 갑자기 솟아났다. (물론 햄버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만.) 겨우 한 장(章)을 읽었을 뿐이라 딱히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꽤나 강렬한 경험이었기에 적어 둔다.

 

산 책

  1. WORD SMART 1, 2
  2. 마스다 무네아키, <지적자본론>
  3. 서윤후, <어느 누구의 모든 동생>

(모두 여의도 영풍문고)

 

그 외의 읽기

이번주에는 뉴요커에서 인터넷을 기반으로 새로운 형태의 아트(도저히 ‘미술’이라는 번역어로는 대체할 수 없을 것 같아 싫지만 부득이하게 아트라고 적는다)를 실험하고 있는 젊은 아티스트, Brad Troemel의 기사를 읽었다.

Brad Troemel, the Troll of Internet Art

아티스트라기보다는 어쩌면 기업가에 더 가까운 마인드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무라카미 타카시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물론 그보다는 훨씬 더 반-시장적이고, 친-인터넷적이다. 제도 비평(Institutional Critic)과 초-개념주의(Ultra-Conceptualism)에서 출발했는데 그 어떤 상업적인 예술가보다도 훨씬 더 상업적이다. 다만 그 ‘상업성’이 지향하는 시장이 다를 뿐. ‘순수미술(Fine Arts)’이라는 개념의 환상을 와장창 깨버리는 도발적인 시도에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찬반이 극렬하게 갈리는가 보다. 겨우 기사 하나 읽은 것으로 이러쿵 저러쿵 말하기에는 너무 아는 것이 없어서 뭐라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이렇게 논쟁거리를 만드는 것만큼은 무척이나 ‘예술가답다’고 느껴진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나서서 어그로(?)를 끄는 사람이 있어야 어떤 분야든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스스로가 앞에 나서기에는 영 자신이 없고, 누군가 판을 벌리는 것을 목격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으니 우스운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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