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넷째주에 읽은 책

아직도 날짜를 적을 때에는 2016년이 익숙한데, 어느덧 2017년의 첫 달이 저물어 간다. 올해 들어 나는 새로운 일을 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월화수목금 매일 같은 스케줄로 움직이는 것은 생각해보니 고등학교 때 이후 처음이다. 20대의 대부분은 학교를 다니며 스스로 짠 시간표에 따라 움직였고, 대학원을 졸업한 이후에도 프로젝트 단위로 프리랜서로 일해온 지라 생활은 학생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중과 주말, 근무일과 휴일의 차이가 근소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나인 투 식스 잡을 갖게 된지 겨우 삼주가 지났을 뿐인데 휴일의 소중함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다. 일요일 밤이 되면 다가올 월요일 생각에 식은땀을 흘린다는 증언이 결코 거짓이 아니었음을 알겠다. 주말에 앞뒤로 하루씩 더 붙여 쉬었을 뿐인데, 오랜만에 출근할 생각을 하니 이상하게 자꾸만 한숨이 나온다. 해야할 일은 많고, 하고 싶은 일은 더 많고, 그 일들을 하루에 다 욱여넣기에는 시간도 체력도 부족하기만 하다.

사고를 마비시키는 습관화된 일상에 저항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내가 선택한 것은 독서이다. 매일 다른 글을 읽으며, 매일 조금씩 새로운 것을 배워나간다. 일을 하면서도 배우고, 사람을 만나면서도 배우고,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도 배우지만, 읽기의 끈을 놓고 싶지 않다. 지금 나에게 독서는 일종의 수행이다. 무-목적적인 활동이기도 하다. 이것으로 무엇을 할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읽는다. 목적이 없는 독서였기에 그것을 기록하는 데에도 특별한 목적은 없다. 읽기를 위한 읽기였듯이 기록을 위한 기록이라고 해두는 것이 옳겠다. 한 번 밀리고 나면 돌이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마냥 즐겁지만은 않을지라도, 하기 싫은 숙제를 꾹 참고 하는 기분으로 이 글을 쓴다.

 

다 읽은 책

연휴가 있어준 덕분에 그동안 다 끝내지 못한 책을 마지막 장까지 읽었다. 그것만으로도 뿌듯했던 한 주였다.

  1.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몰입>
    • 지난주부터 출근 전에 조금씩 읽어왔던 책을 이번주 들어 다 읽었다. 저자인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인간은 언제 제일 행복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플로우’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플로우란 다른 어떤 일에도 관심이 없을 정도로 지금 하는 일에 푹 빠져 있는 상태, 다시 말해 이때의 경험 자체가 매우 즐겁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어지간한 고생도 감내하면서 그 행위를 하개 되는 상태(29)를 의미한다. 이 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는, 플로우를 경험하기 위해 필요한 외적 조건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적인 조건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무리 외적 환경이 안정되어 있고 풍요롭다 하더라도, 스스로가 의식적으로 내적인 질서를 가지고 그 상황에 집중하지 않는다면 플로우를 경험하기 어렵다. 냉소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결국은 익히 들어왔던 ‘행복은 자신이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경구를 심리학적으로 풀어낸 것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 실제로도 그런 면이 없지는 않다 – 저자는 긴 지면을 할애하여 일상의 각 영역에서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는 실질적인 팁을 제시함으로써 그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노력한다.
    • 아쉽게도 그 구체적인 지침들조차도 추상적인 이론의 영역에 머무르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뻔한 이야기만 되풀이하고 있으며 읽을 가치가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플로우’라는 개념이 매력적인 것은 그것을 경험하는 빈도나 상황은 다 다를지라도, 누구나 한 번 쯤은 느껴보았을 법한 보편적인 경험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에 나와 있는 모든 경우가 나에게 바로 적용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구체적인 사례를 읽으며 나의 경험과 견주어 생각해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언제 플로우를 느끼는지, 반대로 언제 플로우를 느끼지 못하는지에 대해 깨닫게 되며, 그를 통해 어떻게 하면 일상의 경험들을 보다 ‘최적화’ 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2. 알베르 까뮈, <페스트>

  • 몇 주째 붙잡고 있던 <페스트>를 드디어 (오늘!) 다 읽었다. 수없이 많은 밑줄을 그었고 귀퉁이를 접었다.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 장까지 독파하게 만드는 서사의 힘은 덜했으나 섬세한 묘사와 그 사이에 숨은 깊이 있는 통찰이 있었다.
  • “나는 인간의 모든 불행은 그들이 정확한 언어를 쓰지 않는 데서 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정도를 걸어가기 위해 정확하게 말하고 행동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재앙과 희생자가 있다고만 말할 뿐, 그 이상은 더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록 나 자신이 재앙 그 자체가 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에 동조하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차라리 죄 없는 살인자가 되길 바랍니다. 보시다시피 이건 그리 큰 야심은 아닙니다.물론 제 3의 범주, 즉 진정한 의사로서의 범주가 필요하겠지만, 그러나 이런 것은 그리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더구나 그것은 아마도 어려운 일일 겁니다. 그래서 나는 어느 경우에는 희생자들 편에 서서 그 피해를 되도록 줄이기로 마음먹는 것입니다. 희생자들 가운데서 나는 적어도 어떻게 하면 제3의 범주, 즉 마음의 평화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탐구할 수는 있습니다.” (타루의 대사, 331쪽)

    “결국.” 하고 솔직한 어조로 타루가 말했다. “내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성인(聖人)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안 믿으시죠?”

    “바로 그렇기 때문이죠. 오늘날 내가 아는 단 하나의 구체적인 문제는 사람은 신 없이 성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고 의사가 대답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나는 성인들보다는 패배자들에게 더 연대 의식을 느낍니다. 아마 나는 영웅주의라든가 성자 같은 것에는 취미가 없는 것 같아요.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그저 인간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럼요, 우리는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어요. 다만 내가 야심이 덜할 뿐이죠.”

    리유는 타루가 농담하는 줄 알고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어렴풋한 빛 속에 선 그의 얼굴에는 어떤 비애와 진지함이 담겨 있었다. (리유와 타루의 대화, 331~332쪽)

  • 그저 인간이 되겠다는 리유의 말을 듣고, 타루는 진지하게 성인이 되고자 하는 그의 야심이 리유의 야심보다 덜하다고 대답한다. 두 번째 읽은 페스트가 나에게 던진 여러 가지 질문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페스트>의 작중 인물들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 다른 의미에서 – 혹은 모두 같은 의미에서 – 인간적이다. 인간성을 잃어가는 시절에 다시 읽은 페스트는 무척 의미심장했다.

 

3. 할레드 호세이니, <연을 쫓는 아이>

  • 오래 전부터 집에 있던 책인데 (아마도 어머니가 구입하셨을 것이다) 이제서야 읽었다. 단숨에 끝까지 읽었다. 상처 투성이인 이야기였다. 열두살 아미르의 선택을 너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가슴이 아팠다. 운명의 희생자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하산의 인생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다른 시대에, 다른 장소에서 태어났다면 겪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 시대에, 그 장소에서 태어난 두 사람의 운명이 다른 이들에 비해 더 가혹했다고 섣불리 이야기할 수도 없을 것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지만 그렇게 잔인한 대로 평범할 수 있었던 이야기에 힘을 불어넣은 것은 한 인간의 죄책감이다. 자신의 과오에 죄책감을 느낄 때, 그리고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속죄를 위한 행동에 나설 때, 인간은 고결해질 수 있다. 잔혹한 운명 속에서도 인간을 원망하지 않았던 하산과 두려움에 머뭇거리면서도 속죄를 위해 사지로 향한 아미르는 모두 비범한 인물들이다.

 

읽고 있는 책

  1. 스튜어트 다이아몬드,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
    • 어제 읽기 시작해 5장까지 읽었다.

 

산 책

기어코 샀다. 이번주에도. 읽는 속도가 사는 속도를 못 따라온다. 소설 두 권, 에세이 한 권. 그 밖에 여러 책들을 들었다 놓았다. 책에 대한 갈증은 쉬이 가시지 않는다.

  1. 최은영, <쇼코의 미소>
  2. 장강명,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3. 김남주, <사라지는 번역자들>

(전부 강남역 교보문고)

 

그 외의 읽기

뉴요커를 구독하고 있는데 한 주에 기사 하나 읽기도 쉽지 않다. 그래도 이번주에는 제법 긴 기사를 하나 다 읽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오랫 동안 독방에 갇혀 있었던 알버트 우드폭스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경범죄로 감옥에 갔으나 그 안에서 블랙 팬더 당의 일원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정부에 위험 인물로 낙인이 찍혔고 부당한 살인 누명을 쓰면서 무려 40년 동안이나 독방에서 수감 생활을 한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극단적으로 스스로를 절제하며 신념을 지켜온 그의 이야기는 무척 인상깊다.

The three men worked to curtail their desires. None of them drank coffee or tea or smoked. “If I feel a habit is developing, or even a disorder of any kind, I counsel myself in spirit,” Wallace told a psychologist. “The more food you eat, the more your body craves food,” he wrote to a friend. “It’s the same for sleep—most of it is mental.” He didn’t like being dependent on security guards to turn the light on every morning, so he kept it on all the time and covered it with a legal pad when he slept, which he did for fewer than three hours each night.

In 1978, when the prison opened a small outdoor exercise cage in C.C.R.—inmates could go outside for a few hours a week—the three men ran barefoot outside, even when frost covered the ground. “We had to make ourselves think that ordinary things didn’t apply to us,” Woodfox told me. “We wanted the security people to think that they were dealing with superhumans.” It was also a coping strategy. “Before I let them take something from me, I deny it from myself,” he said.

광고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